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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Apr 17. 2023

회의 알레르기

회의를 할수록 심해 속으로

유치원 근무 중 가장 괴로운 기억을 꼽자면

나는 한 치의 고민 없이 회의시간을 꼽을 것이다.

회의는 주로 2-3시 경에 시작되어 퇴근 시간에 끝이

났고, 회의를 한번 하고 끝나는 일은 절대 없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내 첫 공황발작도 회의시간이었고,

공황발작으로 쓰러진 이후에는 회의 시간마다

눈앞에서 아지랑이가 피더니 숨이 조여오곤 했다.

숨이 조여 오면 나는 예의보다 생존을 선택하며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가 곧바로 빈 교실에 누웠다.

회의를 마친 후에는 거짓말처럼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아 꼭 두통약을 먹어야 했다.


그럼에도 회의는 누구 한 명이 숨 막혀서 뛰쳐나가건, 공황발작으로 쓰러지던 말건 계속되었다.




일명 도르마무 회의.

우리는 회의시간을 이렇게 불렀다.

회의만 거치면 잘 돼 가던 일도 쳇바퀴처럼 굴러

처음으로 돌아오게 되니 말이다.


우리의 회의를 돌이켜보자면 말도 안 되는 시간이

참 많았다.

그 시간에 업무를 했다면 일이 더 잘 되고, 모두가

조금 더 건강하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코로나가 처음 학교를 덮치던 시절,

아직 아무런 지침이 내려오지 않아 근거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 어떤 준비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퇴근 시간 이후에 회의가 소집된 기억.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아무 생각 없이 참석했다.

그날 우리의 회의는 상상에 상상을 더해

코로나로 인해 유치원에 발생할 모든 경우의 수를

브레인스토밍하는 것에 그쳤다. 밤 11시까지.

명백한 안건이 있는 회의라기보다는

코로나가 심상치 않아. 우리 어쩌지?

코로나에 대한 특정 구성원의 불안을 모두 함께

모여 감당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수록 더 불안이

증폭되는 시간. 그날의 회의는 회의가 아니었다.


물론 상황에 철저히 준비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다음 날 공문이 도착하고 우리가 걱정하던

모든 것은 쓸모가 없었고, 우리는 걱정만 했지 막상

결정한 것도 없고 결정했다 해도 의미 없었다.

우린 그저 지침대로 해야 하는 교육공무원이니까.





우리는 행사 하나를 준비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한 달 이상을 준비했다.

아, 실질적으로 행사준비하는 건 일주일 정도이고

행사에 대한 회의를 하는데 한 달쯤 걸렸다.


담당자는 본인 담당인 행사임에도 회의를 거치지

않으면 세부사항을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담당자는 본인 담당 행사에 대한 세부사항을 결정할

권한은 없지만, 결과에 대해 책임은 져야 했다.


내 담당인데 내 의지대로 결정도 못해,

회의가 2차 3차 계속되니 업무 진행도 안돼,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대로  진행했는데

문제가 발생하면 다 내 탓 이래.


모두의 일을 모두가 함께 하는 구조였다.

회의를 거치지 않으면 업무 진행이 안되니까.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별 보고 집에 가는 것.

그렇게 야근을 아무리 해도 일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면 회의에서는 결정이 되는가?

절대 아니다.

세부사항이 결정되기까지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며

그럴듯한 교육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때까지

스무고개 이상을 넘어야 한다.


헛웃음이 나지만 공모전으로 결정할 때도 있었다.

생일선물듀스 101

졸업식합창곡듀스 101

독서 프로그램 도서 선정듀스 101

아이디어듀스 101

.........

여기가 교무실이 맞는지 의문이었다.



모두가 교원자격에 임용고시까지 통과한
유능한 교사들인데
이런 작은 것 하나 스스로 못 정할까 봐
밤까지 수업준비도 못 하고 있는 게 맞는가?


단설유치원의 조직문화, 체계, 절차, 회의 속에서

교원의 자율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회의에 참석해 사소한 것을 결정하는

배심원 1이 된 기분. 전문성을 증진할 필요는 없었다.

회의 시간에 거수를 하기 위해 존재하는 교사라면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대체할 수 있는

부속품 같은 존재니까.





더 이상 회의시간에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회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침묵만 가득했다.

말해봤자 시간만 길어지고 진행은 안 되니까.

조용히 있다가 손만 들어도 내 역할은 한 것이니까.


그렇게 회의시간은 점점 견디기 어려워졌다.

교사로서의 내가 가장 보잘것 없어지는 시간이기에!


휴직하고 미친 듯이 독서를 했는데

조직 관련 도서에서는 국내, 외 저자를 막론하고

마치 짠 듯이 같은 내용이 나왔다.

회의는 업무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구성원이 가진 가능성과 동기를 제한한다.
즉, 회의는 없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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