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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Apr 06. 2023

우리 반이랑 꽃 산책도 못 가나요?

교육보다 절차

선생님이 꽃을 사랑하는 사람인 탓에

내가 담임하게 되는 반은 봄 수업에 꽃이 가득했다.


알려주고 싶었다.

꽃이 우리에게 주는 설레고 행복한 마음을,

봄꽃이 져도 길가엔 언제나 작은 꽃들이 있다는 걸,

꽃은 사치품이 아니라 사람과 더불어 사는

식물이라는 걸!




7세 담임을 맡은 그 해, 큰맘 먹고 유치원 밖으로

나갈 결심을 했다.

우리 유치원은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었고

아파트가 조경이 뛰어나 온갖 봄 꽃이 다 있었다.

유치원 밖에 아이들과 나가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며

봄 꽃을 보고 오고 싶었다.


주변에 변변한 어린이 놀이 시설이나 녹지가 없는

도시의 유치원에서는 그 방법이

꽃을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초임 시절 바깥놀이 시설과 녹지가 풍부한 환경의

사립유치원에 근무했던 나에게는

바깥에 나가 아파트 단지 한번 산책하고 오는 것은

별 일이 아니게 느껴졌다.


게다가 교실 창문으로도 산수유나무가 보이는데,

바깥에 나가 봄의 기운과 봄 꽃을 느끼지 못하고

봄 꽃 사진자료로 수업을 하고 놀이를 한다는 게

교육적 측면에서 효과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꽃이 코 앞에 잔뜩인데 왜 사진을 봐야 할까?’

같은 연령을 맡고 계신 선생님들께

봄맞이 간단한 산책을 나가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좋다고 하셨다.

역시 동료 선생님들은 아이들 교육에 진심이셨다.




하지만 그 시절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처럼,

유치원의 문을 꽁꽁 닫아두었던 원장님의 방침.

그리고 코로나 2년 차 시기였다.

코로나를 일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관리자께 산책을 나가고 싶다고 말씀드리기 전

굉장히 떨리고 심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보나 마나 엄청난 절차를 요구하거나,

못 나가게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저 바깥놀이의 일환으로 말씀드린 건데,

유치원 밖으로 나가는 건 몽땅 현장체험학습이니

체험학습의 절차를 밟으라고 하셨다.


예상했던 반응이어서 그랬을까,

태연하게 이건 현장체험학습이 아니라 바깥놀이로

계획한 활동이지만 안전 상의 이유로 우려가

되실 테니 절차를 밟겠다고 했다.

활동 추진계획을 올리고,

함께 산책을 가주실 인력 협조를 요청하고,

선생님들은 출장으로 복무를 상신하고,

사전 답사도 다녀오겠다고 했다.

가정통신문 앱으로 안내도 드리겠다고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

관리자께서는 정색을 하시며

학부모 동의도 받으셔야죠

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이 활동은 제 교육적 의도를 담아 계획한 건데
왜 학부모의 동의를 받아야 하나요?

교사가 언제부터 유치원에서 진행하는 모든
활동에 학부모의 동의를 받았나요?

교사가 교육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한 건데
학부모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거라면
교사의 교육전문성은, 교육활동을 진행할
권리는 어디에 있나요?

공문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바깥 활동을 장려한다는데 산책이 왜 문제가 되나요?

관리자님은 아이들이 교실에만 갇혀 있는 게
봄 산책을 하는 것보다 교육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희 반 교육활동을 계획하고 실시하는 주체는 저와 우리 반 아이들 아닌가요?

교무실 분위기가 얼음장이 되도록 언쟁하게 되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교육활동에 대한 교사의 권한을 앗아간다는 건

내가 임용을 본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었기에

나에게는 확실한 분노 버튼이었던 것 같다.


결국 관리자님과 나는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절차 다 밟고 학부모 동의까지 회신받고 나면

꽃 다 져서 산책의 의미가 없겠네요. “라는

나의 체념과 함께 봄 산책은 무산되었다.


나도 더 이상 언쟁하기 지치고,

유치원 주변 한번 산책하는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절차를 내가 수행해 버린다면 이게 선례가 되어

앞으로 다른 산책 활동도 쉽게 나가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나는 절차에 졌다.

그저 교사가 교육활동 진행하는데 교육적 의미보다

절차가 더 중요했다.

이게 공립유치원의 현실이었다.

아직 절차에 한 번 진 것일 뿐인데

벌써 타성에 젖은 공무원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 반의 봄꽃 산책 활동은 내가 직접 나가 찍어온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아이들은 익숙한 곳이라 그런지 즐겁게 집중했고

집 앞에 있던 꽃의 이름을 알려주고 감상 포인트를

소개해주자 집에 가서 그렇게 자랑을 했다고 한다.


진짜 같이 산책 나갔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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