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전문성을 존중합니다.
요즘 ‘해봄’ 작가의 글이 영 나오지 않는다.
홀로 케케묵은 감정과 생각을 토해내던 글들은
‘유보통합’이라는 큰 위기에 자취를 감추었다.
해봄 작가 대신 김해봄 교사의 삶으로 가득 찼다.
나는 왜 이렇게 유보통합 반대에 진심일까?
누가 나에게 유보통합에 대한 입장을 묻는다면
나는 명확히 대답할 수 있다.
저는 유보통합에 반대합니다.
난 ‘유보통합에 반대한다’는 입장이 부끄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내 반대 입장이 공립유치원 교사
전체의 입장을 대변하는 꼴이 되는 것도 싫다.
공립유치원 교사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거리낌 없이 내 입장을 밝히는 모습이
때로, 아니 자주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바로 일부 보육교직원 분들이다.
나는 ‘유보통합 반대’에만 관심이 있지,
‘보육의 가치 깎아내리기’에는 관심조차 없는데,
내 의견 피력이 보육교직원 분들의 입장에서는
보육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느껴지나 보다.
물론, 내가 공인도 아니고 일개 교사이기에
한 명 한 명의 기분이 상하게 된 것은 개의치 않는다.
나는 내 공간에 내 의견을 남겼을 뿐인데,
보육을 무시했다며 내 의견의 논점을 흐리는 분까지
모두 마음을 살펴드릴 수는 없다.
내 글과 컨텐츠를 접하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 sns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만 활동한다.
신체적 배터리가 작은 나에게
남에게까지 신경을 쓸 에너지는 없다.
그래서 내 글로 인해 오해를 하는 분이 계시더라도
나는 꿋꿋하게 내 생각을 적을 거다.
나를 위해서,
내가 한 때, 아니 지금도 진심으로 애정하는
유아교육을 지키기 위해서!
유보통합 반대=보육 무시
라는 이 자동적 사고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내 주변에는 유아교육과를 나왔지만, 유치원보다
어린이집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이 더 많다.
그들은 입사가 하늘의 별따기인 직장 어린이집에
근무하기도 하고, 유치원 근무경험이 전혀 없이
초임 때부터 쭉 어린이집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가장 존경하는 친구는 어린이집에서 영아반만
맡아오던 친구다.
어린이집에 근무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내 근무환경과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난다.
더 정확히는 ‘기관에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유치원에서는 무조건 개별 학급과 유아에게 적합한
‘교육’이 최우선 과제이다. 학교교육이니까!
물론 유아들의 나이가 어리기에 보육과 돌봄의
영역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지만 그게 주는 아니다.
반면 어린이집은 유치원에 비해
‘아이들이 편안히 어린이집 생활을 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둔 느낌이다.
당연히 내가 어린이집에 근무해 본 적이 없기에
정보가 적어 완벽한 비유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어린이집은 여성의 경제활동과
자녀 돌봄에 대한 개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복지’ 시설이라는 것이다. 현행법에 따른 것이다.
어린이집에서 교육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어른이나 아이나 삶의 경험을 통해 배우는 건 같다.
하루의 대부분을 어린이집에서 보내는 아이들이
어린이집 생활을 통해 배우는 게 없을 수가 없다.
아이들이 매 순간 경험하는 것을 평범한 일상의
일부로 여기지 않고, 배움의 기회로 포착하는
어린이집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린이집이 교육기관인건 아니다.
기관의 목적이 ‘안전하고 편안한 보육을 제공’하는
것이고, 법적으로 사회복지시설이다.
교육이 완전히 배제된 돌봄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보육에 일부 자연스러운 교육이 포함되었다고 해서
교육기관으로 칭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매 순간 경험으로 조금씩 배우고 성장한다.
어린이집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건 당연하다.
아이들은 보육시설에서 질 높은 보육을 받으며
많은 시간을 보내니 경험한 시간만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유아들에게 무엇을 왜 어떻게 교육할지 ‘가
주요 목적으로 학교가 운영되고, 유아들이 어리기에
자연스레 보육이 추가되는 유치원과는 다르다.
상하개념으로서의 위아래가 아닌, 다른 개념이다.
보육기관은 절대 교육기관이 될 수 없다.
교육기관도 절대 보육기관이 될 수 없다.
일상을 통해 얻는 배움이 있으니 보육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교육도 일부분 포함될 뿐이다.
나이가 어린 유아들에게 각 발달영역을 고려한
교육학과 발달심리에 근거한 교육활동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보육도 일부분 포함될 뿐이다.
질 높은 보육을 받는 경험 속에서 배움이 있다고
헤서 보육기관이 학교교육이 같다는 건 비약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일하며 경험으로 배우는 직장도 교육기관이고
자신에게 필요한 복지를 받으며 성장하는 사회복지
시설도 교육기관이고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성장하는 각 개별 가정도
교육기관이다.
이 논리라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인간과 관련된 모든 곳’이 교육기관이 되는
대 혼란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논리에 의하면 때로는 아이들보다
유치한 것 같은 국회도 교육기관이 될 수 있다.
어린이집은 복지시설이며 보육을 위한 기관이고
아동보육에 대한 전문가들이 전문성을 발휘한다.
유치원은 학교교육이며 교육을 위한 학교이고
유아교육에 대한 전문가들이 전문성을 발휘한다.
지금까지 유아교육과 아동보육에서 전문성을 발휘
하며 자부심을 갖고 근무했던 사람들이 왜 무작정
서로를 깎아내리고, 작은 것에 오해하는 상황이
된 건지 안타까울 뿐이다.
왜 유아교육과 아동보육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가벼이 생각하고 추진하는
정책에 우리의 정체성이 흔들려야 할까?
왜 ‘학교교육‘이었던 유아교육은 학교교육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보육으로 분류되어야 할까?
이게 정말 아이들을 위한 변화인가?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한 변화인가?
학부 모을 위한 변화인가?
유아학교 교사와 어린이집 보육교직원과 현장을 위한 변화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보통합으로 이익을 보는 특정 소수 집단이 있다.
그 외의 유아들과 교사, 선량한 시민들은 모두 피해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