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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들과 명절

by 자봉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흘러가니 또다시 한 해가 바뀌었다.

새해 설날연휴는 5일부터 8일 9일까지 쉬면서 부모형제와 고향을 찾는 이들도 많을 것이며,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이렇게 매년마다 해 가 바뀌어 명절인 설이나 추석날이 다가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부모형제들을 만날 수 있으니 기다려지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도 밤하늘의 별들만 총총 빛나고 인적 소리가 들리지 않은 고요하고 적막한 시골 벽지 외 딴 마을에서

서너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이웃들이 다 가족 같은 정담 있는 소박한 농촌이라기보다는 산촌에서 태어난

우리 형제는 4남 3녀인 7남매이었다.

7남매 중 장남인 나는 삼촌들은 상급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내 바로 밑으로는 두 살 세 살 터울인

동생들이 줄줄이 함께 크다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워 검정 고무신을 신고, 보자기에 교과서를 둘둘 말아

등뒤에 메고 10리 길을 산마루와 공동묘지를 지나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숲이 우거진 오솔길과 마을 인가도 보이지 않은 공동묘지 옆을 지날 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서 손쌀같이 집으로 달려오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국가적으로 어렵고, 가정이나 개인경제가 모두 다 어렵다 보니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대부분의 가정의 아이들이

제대로 식사도 못하고 끼니도 굶으면서도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국민학교와 중학교까지는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집안 사정도 어렵다 보니, 내 위로 한 명 계셨던 누님은 간신히 초등학교만 졸업시키고 바느질과 논, 밭일을 하시다가

불치병인 암으로 돌아가셔 내게는 큰 충격이며 슬픔이었다.

내 바로 밑 여동생도 돈이 없어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1년 동안은 집에서 많은 일을 하다가 다행히 1년 후에라도

중학교에 진학해 10리 길을 걸으면서 학교에 다니느라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장남이었던 나도 다른 남매들처럼 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든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해 초가삼간 흙담집 단독주택의

방 한 칸을 어렵게 구해 손수 쌀을 씻어 밥을 해 먹거나 나무땔감이 없어 밥도 짓지 못하고 배를 굶주리면서

학교를 다녔다.

농촌의 대부분의 가정이 어렵지만 유독, 우리 집은 자동차도 들어오지 못하는 깊은 산속이다 해다 비치는 일조량이 적어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간신히 진학했지만 육성회비와 수업료를 항상 제대로

납부하지 못해 툭하면 교무실에 불러가 상담하느라 학창 시절은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장남으로 태어나 학교 수업은 많이 빠지고 대충 공부해 간신히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지만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고 보니 취업할 곳이 없어 음식점에서 카운터 보조와 서빙, 건물과 야외 행사장에서

24시간씩 야간에 경비원을 하면서 경찰공무원과 법원직, 그리고 김포국제공항 관리공단 직원 공채시험에 합격해

면접시험에서 낙방하고 계속해서 야간에 경비원 근무를 하면서 주간에는 도서실을 찾아 공부하면서 철도청과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체신행정 공무원이 되었다.

그 당시 공무원 봉급은 10만 원도 되지 않은 박봉이지만 매달 월급이 정기적으로 지급되니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

연달아 성장하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고향 시골에서 서울로 데리고 와 봉천동에서 보증금 50만 원에 월 5만 원씩 내는

사글셋방에서 동생들을 데리고 자취를 했다

한 달 근무하고 매월 받은 봉급 10만 원은 월세 5만 원으로

지출하고 나머지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데리고

있으면서 용돈과 반찬거리를 사면 매월마다

저금하기도 어려웠다.

이렇게 내가 우체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남동생을 데리고 있었는데 남동생 역시 용돈이

부족해 내가 근무하고 있는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는 아르바이트 일을 24시간씩 교대로 근무하면서 동생도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다.

이렇게 우리 집의 형편이 좋지 않다 보니 우리 형제들은 어렵게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공무원에 합격하여 우체국과 철도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주간만 근무하는 지방행정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그곳에서 무사히 정년까지 하게 되는 행운을 얻였다.

나도 현역병으로 강원도 최전방에서 3년 동안 군 복무를 충실히 하고 전역했지만

현역 사병으로 전역한 남동생도 궁핍한 부모님께 의존할 수 없어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우리 우체국에

와서 24시간씩 힘들게 아르바이트 일과 도서관에서 틈틈이 법원직 공무원을 준비하다가 우연챦게 응시한 교정직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고향에서 교정직 공무원으로 교도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월급은 박봉이지만 나와 동생이 공직생활을 하면서 비록 작은 봉급이지만 매월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으면

고향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텔레비전과 세탁기 선풍기 등 가전제품들을 한 개 한 개씩 구입하여

어머님께 갖다 드리니 너무 즐거워하고 행복해하셨다.

어쩌면 어머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어머님의 인생 중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전성기가 동생과 내가 공직생활을 하면서

자주 고향과 부모님을 찾아뵙고 용돈을 드렸던 그 시절인 것 같다 ㆍ

그러나 이러한 행복도 잠깐ㆍㆍㆍㆍ

남동생이 고향에서 퇴근을 하다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바로 그날 현장에서 사망해 우리 집은 하루아침에

초상집이 되어 버려 어머님은 실성한 사람처럼 10년을 더 사시다가 별세하셨다.

남동생이 스물아홉에 교통사고를 당해 바로 현장에서 사망해 버리니 우리 가족들은 뼈를 깎는듯한

고통과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30여 년 전 화장문화가 제자리를 잡지 못한 터라 서너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고향집에서

꽃상여를 구입해 집과 떨어진 산에 동생을 묻고 또 다른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막내 남동생까지 화장을 해

후세에는 고생하지 말고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라고 고향산천 높은 산에서 바람에 날려 주었지만

매년마다 찾아오는 명절이 되면 부모님과 먼저 떠난 누나와 남동생들 생각으로 즐겁지는 않고

그리움과 보고 싶기만 한다.

남동생이 사고로 하늘나라로 떠나 너무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다행히도 동생이 근무하는 교도소에서 소장님과

과장님 그리고 교정직 공무원들이 퇴근 후에는 시골 우리 집으로 찾아와 제복을 착용하고

최대한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주어 평생을 교도관님들께 너무 고맙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고 감사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남동생을 너무 빨리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지만 수십여 명의 제복을 입은 교정직 공무원들이

내 가족처럼 혼연 일체가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남동생의 장례를 치러주어 마음도 든든했고, 동생이 제복을 입은

교정직 공무원 즉 교도관이라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이제 한 많은 세월이 흘러 벌써 3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남동생의 뒤를 이어 어머님과 누나 그리고

또. 다른 막내 남동생과 나이 어린 조카도 하늘의 별이 되어 버렸으니 명절이면 항상 슬프고 가슴 아프고 그립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말 못 할 사연들로 고생하는 이웃들이 많다

매년 찾아오는 명절이 되면 고통받고 슬픔에 젖어있는 이웃들을 생각하고 한번 더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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