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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가 살아나 보니!

by 자봉

어릴 적 고향 농촌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옻이 올라 얼굴과 온몸에 진물이 나 학교도 못 가고

죽을뻔했다


어머님과 할머님은 종손인 나를 살리려고 참깨를

손수입으로 씹어 내 몸 전체에 발라줬다


60년대에는 의료시설도 빈약해 구전으로 들어오는 민간요법으로 치료했지만 옻을 잘 탄 나는 집에서

키운 일소, 누렁소를 끌고 산으로 가 서너 시간 풀을

뜯어먹으면 집으로 데리고 왔다


농촌이라기보다는 산촌에서 자랐기에 산 아래

밭이나 임야를 다니다 보면 꼭 옻나무 근처에

나도 모르게 가게 된다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옻도 잘 걸리지 않은데

허약한 체질인 나는 옻나무만 봐도 옻에 걸려 자주

피해 다녀야만 했다


옻나무를 보게 되면 그 방향을 보고 침을 뱉어라고

하여 어릴 적에는 그렇게 했다


옻에 올라 죽을뻔했고 두 번째는 초등학교 때 삼촌이

화가 났는지 나를 쫓더니 시골집 근처에서 잡혀 손바닥으로 배 부분을 사정없이 쳐 버려

숨이 끊어질뻔한 기억이 있고,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돈이 없어 아침밥도 굶고

점심 도시락도 없어 너무 굶었는지 수업 중에

두세 번 쓰러진 아픈 경험이 있다


어디 그뿐이랴!

광주 조선대 뒷산에 올랐다가 불량배를 만나

걸음아 나 살려라 고 줄행랑을 치며 도망 나와

화를 면 했던 시절도 있었고


단독주택 대문에 분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신문 구독자

집에 당구장 표를 만들다 보면 열려있는 대문으로

불도그 같은 개들에게 물릴뻔한 학창 시절의 신문을

배달했던 어려움도 많았다


이러한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면서 행사장과

일반건물 백화점 지하주차장에서 매연을 마시고

주차정리도 하면서 어렵고 힘들게 공부해

안정적인 직업을 찾고자 공무원 공채시험준비를

하면서 서너 군데 합격해 보수는 작았어도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면서 일과 학업을 병행해 대학과

대학원을 오랫동안 다녔다


머리는 좋지 않지만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어

7급과 사법고시도 도전해 봤지만 보기 좋게 낙방해

나이가 드니 포기해 버리고 직장생활에 충실했다


가정에 충실하면서 직장생활 때는 빨리 승진하고자

인센티브 사업이나 다른 직원들이 기피하는 업무를

더 많이 맡으면서 승진은 항상 임용동기들 중 가장

먼저 승진해 항상 승진이 2년 3년은 빨랐다


이렇게 부지런히 살아온 탓인지

정년 몇 년을 남기고 부부동반 설악산에 갔다가

사우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깨어보니 직장

동료 서너 명이 한참 동안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고

119 소방 구급차를 타고 속초보광병원 응급실에

실려 살아나 대학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받아보니

미주신경성으로 뇌에 피가 정상적으로 순환되지

않아 갑자기 실신했으니 항상 조심하라고 한다


몇 년이 흘러간 뒤

어느 날 집 근처 지하 목요탕에 들렸다가 현기증이

생겨 탈의실에 나왔는데 또 의식을 잃고 실신했나

본다


정신을 들어와 눈을 떠보니 119 구급요원들이

와 있어 안정적으로 살아났다고 해야 할지?

쾌유되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다 보니

모든 분들에게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아무리 인명은 재천이라고 해도

나이가 들면

건강에 조심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항상 긍정적으로 살아가면서

감사함을 느끼면서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인생이란!

건강할 때에는 사랑과 행복만 보이지만

허약할 때에는 걱정과 슬픔만 보이는

게 인생인가 보다


창 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다

모레가 설날이어서 그런지

고향은 있어도

가지는 못 하지만

저 멀리 떠나신 조부모님과 어머님

그리고 서른도 되지 않은 이른 나이에

너무 일찍 오십 대 초반에

영영 볼 수 없도록 떠나버린 누나와

친지들 동네이웃들이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보고 싶어도

다시는 뵐 수 없지만 ㆍ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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