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부부는 농사를 짓는 가난한 빈농의 자녀로 태어났다
부부의 공통점은 농사를 짓는 시골 빈농의 장남과 장녀로 태어나 온갖 고생을 하면서 학교에 수업료와 육성회비 등 사납금도 제대로 내지 못하면서 툭 하면 담임선생님께 교무실로 불러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렵다보니 일찌감치 부모님한테 의지하지 않고
아내는 대전에 소재한 충남방직공장에 취직해 낮에는 일을하고 야간에는 고등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야간 산업체부설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물론 월세방도 얻을 형편이 안되었기에 회사에서 기숙사 생활을 3년
동안 하면서 쉬는날도 없이 말 그대로 주경야독을 했다
나 역시나 시골이라기 보다는 산촌에 가까워, 마을이라야 서너가구가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사는 전기불도 없어 등잔불을 켜고 손바느질을 하고 다랭이논 몇마지 농사를 지은 부모님 슬하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0리 떨어진 읍내로 나가 부모님이 구해준 초가집에 월세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하면서 툭하면 밥을 굶고 온기가 없는 방에서 자취했다.
덮고 자는 이불은 밭에서 어머님이 키운 목화로 솜을 만들어 두껍게 만들어준 이불을 듸집어 쓰고 힘들게
학교를 다니면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가난했기에 돈도 없고, 항상 수업료도 제대로 납부하지 못해 가난한 생활이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지긋지긋 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털털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의 논밭일을 도와드리는것도 지겨워
고향집에 매주마다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쌀과 반찬 아궁이에 피워야할 마른 나무가지들을 가져가야 하기에 할수없이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을 매주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루틴처럼 찿아갈수 밖에 없었다,
이런 중학교 생홀이 지긋지긋해 학교를 졸업하고 대도시가 그리워 태어난 이후 난생 처음으로 광주 광역시에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제출해 합격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배정을 받아 중학교 친구가 먼저 구해놓은 자취방에 빌어 붙어 또 다른 고난이
시작되고, 매주 토요일이면 중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 논,밭일을 도와 드리고
수업료와 기성회비를 달라고 부모님께 말씀 드리면 항상 돈이 없었다.
부모님의 부탁으로 고향 이웃집에서 농사와 소장사를 하시는 먼 친척아제에게 입학금과 수업료를 빌려 고등학교는 지방일간신문 저녁 석간을 배달하면서 학교를 다녔지만 학교 생활은 엉망 진창이었다.
돈도 없어 여러가지 사항으로 실업계 고등학교로 전학계를 신청했지만 내가 배정된 고등학교는 인문계 사랍
고등학교 이기에 학생들 수업료에 의존한 사립고는 기어이 실업계로 전학을 시켜주지 않아 어쩔수 없이
영혼없는 학교생활을 계속 해 나갔지만 졸업하기전 4개월 전 부터는 취업했다는 핑계로 수업을 빠지고서도
담임 선생님의 배려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간신히 받았다
인문계고등학교를 졸업은 했으나 취직도 할수 없어 직업 안내소를 통해 나무로 액자를 만드는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다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현역병 입영통지서를 받고 강원도 인제 원통에서 사병으로 34개월간 군대생활을 하면서 야간 불침법 당번과 휴식시간에는 5급을류 공무원 시험준비를 해 나갔다.
동부전선 최전선에서 3년동안 국방의무를 수행하면서도 꼭 공무원이 되어 야간대학에 진학하고자 힘들고
어렵게 공부를 했지만 시험치를 기회도 없이 전역을 하였다.
3년동안 뼈 빠지게 나라지키느라 고생했지만 전역비 한푼도 주지 않은 그당시의 군대 생활이었기에 군 인사
명령으로 제대를 하였지만 반기는 곳도 없고,수중에 돈 한푼 없이 사회에 나오니 또 다시 예비군복을
벗어놓고 서울에서 각종 행사장에서 야간에 경비원생활과 요식업소 종업원 신문 배달을 하면서
공무원 시험준비를 주경야독 하다 보니 철도청.우체국, 경찰,. 지방행정공무원시험에 합격했다.
26세에 공무원이되어 서울시 모 동사무소에 첫 발령을 받아 선거업무와 환경정비담당을 하면서 그동안 배우지 못했던 대학공부를 하기 위해 직장생활과 공부를 병행해서 함께 할수있는 방송통신대에 입학해
라듸오 강의를 들으면서 열심히 공부해 학사 학위를 받았다.
힘들고 어렵게 시간을 쪼개 공부를 하면서 우리고유 민족 대명절인 추석에 고향 시골의 중매쟁이분의 소개로 추석당일날 아내와 맞선을 본후 장모님이 제 사주와 근면성을 인정하여 아내와 결혼에 골인하고
반지하방 전세를 가격이 저렴한 서울 외곽도시 경기도 부천 중동역 근처에 신혼방을 얻어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당시에는 입식부엌도 아니고 수세식 화장실도 아닌 모든 것이 재래식으로 부엌에서 샤워도 하고, 시멘트
바닥에서는 지렁이가 자주 나오고,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 항상 세숫대야를 받쳐놓고 잠을 자는
등 어렵게 딸 둘을 키웠다.
그래도 아내는 집에서만 아기를 키울수 없어, 조금이라도 용돈을 벌기위해 구슬을 가져와 실에 꿰어 한 개당 얼마씩 받는 부업을 하면서 새옷도 사지 않고, 재래시장이 끝나갈 무렵에 시장 바구니를 들고 가
채소와 생선을 사 반찬을 만들면서 내집 장만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메고 생활했다.
이렇게 항상 우리부부는 근검절약이 몸이 베어 부지런하게 살아오면서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이삿짐센터에
나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무주택의 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푼돈만 생기면 은행에 찾아가 저축을 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탓인지 우리에게도 좋은기회가 왔다
대한지방행정공제회에서 지방행정공무원들에게만 분양하는 아파트를 분양받아 지금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수십년째 살고 있다
최근에 부동산가격이 폭등해 집값이 조금 비싸지니 처제들이 돈을 빌려달라기에 빌려주었더니 갚지않고 연락도 두절해버렸다.
처남과 처제는 매형과 누나는 서울집값이 비싸고, 잘 살고 있으니 동생들을 도와 줬다고 생각하라면서
말도 안되는 궤변론을 말하면서 빌려간돈도 갚지않을려고 나쁜 마음을 두고 갚지 않아 이제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딸만 둘인 나는 아들을 못 낳았다고 아버지한테 논 한마지기도 못 받고, 아들 못낳은 칠거지악이라고 아버지한테 평생동안 무시를 당하고 살면서 종종 아내가 우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괴롭고 아팠다.
두 동생들은 교통사고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버리고, 아버지는 동생이 아들을 낳자 모든 재산을 팔아 현금으로 동생한테 주고, 4살짜리 동생아들에게 모든 임야를 몰래 증여해줘버린 아버지가 보기 싫고 미웠다.
이렇게 인복이 없어서 그런지 친구들 보증 서주었다가 수천만원 변상해주고, 집에서 아들 못낳았다고 우리 부부가 아버지에게 무시와 서러움을 많이 당했지만 열심히 부지런하게 근검 절약생활로 열심히 살아준 아내와
우등생으로 잘 성장해준 두 딸에게 고맙고 감사할뿐이다.
이렇게 수십년동안 고생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두딸 뒷바라지를 위해 먹을것 놀러다니는것 아껴가면서 두 딸들 대학과 대학원 졸업시키고 외국 유학을 보내 회계사와 신문기자가 되어준 딸들이 자랑스럽고 다시 한번
아내에게 큰절을 하고 싶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으로 역경의 삶을 살아오면서 오뚜기처럼 억척한 인생을 살아온 우리 가족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지만 그토록 힘들게 했던 친구와 친척들을 생각하면 하염없는 슬픈 눈물만 나온다.
이제 백세시대 인생의 황혼기에는 아픈과거들은 다 잊어버리고 좋은것들만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면
행복해지니 마음을 비우고 건강하고 즐겁게 살리라.
이제는그냥 귀를 닫아버리고 많아 조금씩 손해보더라도 친구와 동생들과 처남들 그리고 이웃들을 용서하면서 마음 편하게 건강하게 살다가 떠나련다.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미워하지 말라는 (불원천 불우인) 고사성어가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