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이나 산간벽지 외딴섬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 가난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은 성년이 되어
힘들고 어려웠어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고향과 부모, 형제들을 그리워하고, 가난한 시절에 점심 도시락도 준비하지 못한 가난한 제자들을 위해 선뜻 선생님의 도시락을 제자들에게 내준 잊지 못할 고마운 선생님과
은사님들이 영원토록 추억에 남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필자도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외 딴 고향집에서 독립하여 읍내에 소재하는 남자중학교에 입학해 30리 길을 걸어
다니고, 공부보다는 산에 나가 소나무 송충이나 잡고, 농번기 방학 때 부모님 농사를 도와주다 보면 공부는
뒷전이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게 급한 시절이었다.
1970년대 농촌에서 모두가 다 “잘살아보자”라고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농촌 외딴곳에서 태어나 힘들고 어렵게 공부했던 나는 농촌생활이 지긋지긋했다. 도회지가 그립고, 그래서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연합고사를 치르러 처음으로 광주시 땅을 밟았다.
무작정 광주 시내 고등학교로 진학하다 보니 자취하기 위한 방 얻을 돈도 없어 학교 진학을 포기할까 생각했다. 그러다 다행히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분의 자제인 김백중 친구가 광주에 자취방을 얻어 혼자 생활한다기에 함께 자취 생활을 하면서 같은 고교를 다녔다.
팍팍한 자취 생활을 하다 보니 연탄불은 항상 꺼져 있고, 툭하면 밥을 굶어 점심시간이면 친구들 몰래 수돗가로 가서 수돗물로 굶주린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이런 학교생활은 계속됐고 수업료를 내지 못해 수시로 교무실로 호출됐다.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려니 정말 힘들었다. 이렇게 먹지도 못하고 돈도 없으니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고 성적도 좋을 리가 없었다. 굶주림을 참고 혼자서 극복해 나가야만 했다.
나중에 면에서 근무하는 면서기 공무원이라도 하려면 어떻게 하든 고교는 졸업해야 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석간신문인 전남일보를 배달하면서 힘겹게 3학년 1학기까지 마쳤다. 서울에 가고 싶어 허옥 선생님께는 취업이 돼 서울에 간다고 거짓말한 후 용산역까지 완행열차를 11시간씩 타고 도착했다.
무작정 서울로 와서 신문 배달을 하며 생활하다가 군대에 입대했다. 현역 군 복무 3년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니 취직할 데가 없어 행사장이나 전시장, 백화점에서 주차안내 등 임시직 일자리를 전전했다. 그러다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주경야독으로 00 지방 행정직에 합격했다. 독서실에서 숙식하면서 남보다 빨리 승진하기 위해 방송통신대와 중앙대를 졸업하고 한양대 지방자치대학원을 다니면서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다.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에 교련복과 교복을 번갈아 가면서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뚜렷한 목표도 없이
자취를 하면서 학교에 다녔기에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까지도 학교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고,
너무 마음 아픈 기억이 많았던 고교 교정이 생각나 42년 만에 모교를 방문했지만 내가 힘들게 공부하면서 수돗가에서 물로 굶주린 배를 채웠던 그 시절 교정은 사라졌고, 이제는 공동주택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40년 만에 개최하는 동창 모임에 참석해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은 동창들과 같은 반이었던 학우들을
만나 졸업 40주년 축하모임 동창회를 개최하면서 나에게 졸업장을 주셨던 담임선생님을 찾았더니 연로하셔서 뵙기도 찾기도 어렵다고 한다.
1970년대 그 당시에는 먹고살기도 바쁘고,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결석도 많았고, 3학년 2학기가 되면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활동과 취직을 했다고 학교 수업도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어엿하게 졸업장이 있어 먼 훗날 방송강의와 학점은행 등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에서 공부도 하고 졸업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 모든 은덕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은덕이라 생각한다.
고 3 때 담임선생님이셨던 허옥 선생님이 졸업장을 주지 않았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생활했을까.
내가 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공직자로 첫 임용되기 전까지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기에 음식점 종업원과
야외 행사장에서 경비원, 빌딩 지하주차장에서의 야간 경비원, 액자를 만드는 표구사에서 추위에 떨면서
어렵고 힘든 근로를 하면서 배움의 끈을 내려놓지 않고 항상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하고, 독서실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를 했기에 20대 후반에 지방행정공무원이 되어 결혼도 하고, 내 집도 마련하고, 자녀들을 낳아
자녀들도 훌륭하게 교육시키고 성장시켰으니 이 모든 게 담임 선생님의 은덕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수업을 많이 빠져 만일. 재적이라도 되었으면 내가 검정고시를 준비했을까! 아니면 그냥 중도에서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자포자기로 인생이 너무 힘들다고 이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오후 수업이 끝나면 바로 신문보급소로 달려가 신문지 사이 만다 선전지를 넣고 200부를
왼쪽 어깨에 끼고, 시내버스를 타고 버스비 대신 석간신문 한부를 버스기사님 게 드리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등산 입구 증심사 주변 닭을 키우는 양계장까지 신문을 배달하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학교 등교 대신 보급소로 나가 구독자 집을 일일이 방문하면서 신문구독료를 수금하다 보면 한 달도 참
빨리 지나갔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공부해서 졸업을 한들 기다려 주는 대학이나 직장은 없어 졸업 후에는 그립고 동경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에 야간 완행열차를 10시간 동안 광주역에서 용산역으로 타고 와 내리면
새벽 4시 5시이었다.
통일호나 무궁화호 새마을호는 요금이 비쌌기에 가장 저렴하고 간이역까지 전부 정차하는 비둘기호 열차를
타고 용산역과 광주역을 오고 다녔기에, 나의 소년 시절의 용산역과 광주역은 나에게는 눈물역이다.
유명한 가수 임영웅에게는 사랑역이지만, 가난하고 힘든 청소년기 나에게는 사랑역이 아닌 눈물역이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졸업 44년만 담임 선생님이셨던 허옥 영어선생님을 천신만고 끝에 광주에서 재회하였으나 선생님은 퇴직 후 목회공부를 하신 후 목회자가 되어 목사님으로 봉직하고 게셨는데 연세도 거의 90세
가까웠지만 믿음으로 살아온 탓인지 강건하고 건강하셨다.
목회자가 되신 선생님은 A4용지에 창세기와 구 세기 그리고 노인과 어르신의 구별과 차이점 등 을 새 악처럼
빼곡히 볼펜으로 적어 10여 장을 복사해 참석한 제자들 7명에게 나눠주고 성경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는데
과거가 아닌 현실에서 바로 오늘 70세를 바라보는 실버의 나이에 옛 스승님으로부터 제자들이 성경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