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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봉 May 01. 2024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고생만 하시다가  떠난 내 어머님

내 고향은 산 좋고 물 맑은 천혜의 땅이며, 오염되지 않은 심산유곡의 산촌인 남쪽 나라 정남진 장흥이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난 곳과 지척 마을인 대여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경주 이 씨 익제공파 집성촌으로 시집왔는데 아버지 얼굴만 보고 중매로 결혼했다.

아버지는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강원도 양구 2사단에 입대했으나 전쟁 중이라 전역을 못 하고 7년 동안 장기간 복무하셨다.


어머니는 시부모님과 시동생, 시누이가 여섯 명인 대가족에 시집와서 남편 없는 시댁에서 독수공방으로 논밭일을 하면서 시동생 둘을 대도시인 광주까지 유학 보내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 이렇게 보수적이고 유교적인 집안의 종갓집 종부로 시집와 정녕 당신의 딸들은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만 보내는 등 너무 많은 희생을 하셨다.

((1953년 부모님 약혼사진)

1968년 당시엔 집도 초가집이고, 도로가 포장되지 않아 완행버스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노라면 신작로는 흙먼지로 뒤덮였고 나는 검정 고무신과 나일론 바지를 입고 마을도 보이지 않는 깊은 산과 계곡, 공동묘지 옆을 걸어서 10리쯤 되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참으로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이렇게 종갓집 종손인 나는 보따리에 책을 싸서 등에 메고 학교를 다녔고, 이 세상 한 명뿐인 두 살 터울 누나는 학업을 포기하고 삼촌들을 뒷바라지하며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중학교도 진학하지 못한 채 초등학교만 졸업했다. 어린 딸에게 바느질과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밭에서 일을 시켜야 했던 어머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어머니는 시동생들을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보내기 위해 머리에는 김치와 쌀을 이고 구불구불한 산허리를 돌고 돌아, 완행버스가 다니던 신작로까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배웅했는데 이는 내가 초등학교 때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이렇게 어머니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휴가 나온 아버지와 결혼해 힘들게 살면서 우리 7남매를 낳아 딸들은 공부도 가르치지 못했고, 그나마 아들 4형제는 남의 밭일과 농사일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보냈다. 하지만 가르치지 못했던 큰딸을 불치의 암으로 먼저 보내고, 사랑스러운 두 아들마저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뒤, 4년 전 추석 무렵 자식 뒤를 이어 하늘나라로 가셨다.

이렇게 어머니는 입이 있어도 말도 못 하고, 시동생들 공부를 위해서 정작 당신의 딸들은 못 가르쳐 평생을 마음 아파하며 인고의 삶을 사신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종갓집 종부였다고 기억한다. 생전에 속은 시꺼멓게 태우며 살아가셨을 어머니, 그렇게까지 참고 인내했던 어머니가 무척 그립다.

경주이씨 익제공파가 씨족사회로 자연부락을 형성한 오지 산골 종갓집 종부 며느리로 시집오셔서

평생동안 고생만하시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2016년 추석전에 별세하신 어머님이 보고싶고

그리워진다.

인자하고 자애롭고 마음씨 선한 내 어머님 이셨는데..


(1988년 내 결혼식 때,  장흥읍 희망예식장에서)






-2002년 목동 오목교 청학부페에서 어머님

  칠순잔치-




   (앞줄왼쪽이 나.  뒷줄 오른쪽 여동생을 데리고 있는분이 어머님 그 앞이 이세상에 한명뿐이었던 애석하게

   일찍타계한 나의 누님 덕순이 누나, 외할아버지 회갑때 사진 1964년 )








     (다복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서울 나들이때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다정하신 포즈를 취해

        준 모습)








(남동생 금채 1997년 고인이 되었고

막내동생 병희 마져 2000년 하늘의 별이

되어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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