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의 시대는 격동과 긴장 그 자체였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무거운 소식이 전국을 흔들고 있을 때, 나는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의 이름으로 조국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입영 통지서, 그 차가운 종이 한 장이 나의 푸른 청춘을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 육군 제12사단 을지부대로 이끌었습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미치겠다."
입대 전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이 서글픈 전설은, 읍내와는 거리가 멀고 산세가 험하기로 악명 높았던 인제 원통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북단, 산악 휴전선을 사수하며 전쟁이 발발하면 백두산까지 선봉에 서서 진격해야 하는 용맹한 전투 사단. 그곳이 바로 내가 34개월 동안 젊음과 온 정열을 바쳤던 을지문덕 장군의 후예들, 그리운 전우들이었습니다.
1980년대 초, 교통은 참으로 열악했습니다.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포장되지 않은 비포장도로를 금강 고속버스에 몸을 맡긴 채 네 시간을 덜컹거리며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고립된 땅이었습니다. 국방색 푸른 군복을 입고 "싸우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했던 그 시절, 함께 고생했던 전우들과의 시간은 어찌 꿈엔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켜야 했던 전선은 물이 부족하고 눈이 많아 군인들의 고생이 심했던 향로봉과 진부령을 껴안고 있었습니다. 남과 북의 군인들이 24시간 긴장 속에 대치하며, 대남방송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어가며 지켰던 155마일 휴전선 철책선. 밤낮없이 경계하며 섰던 비무장지대와 향로봉 정상의 매서운 칼바람은 지금도 온몸의 감각으로 생생합니다.
수천 발의 표적지에 주야간 사격을 집중했던 칠성고개 사격장의 기억 역시 잊을 수 없습니다. 거의 백발백중으로 표적지를 맞추기 위해 쏟았던 땀방울, 그 집중의 순간들이 이제는 아득한 시간이 되어 그리움으로 피어납니다.
1980년, 이등병 월급 2,700원의 봉급으로 살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담배꽁초도 찾아볼 수 없던 군 생활, 무상으로 배급받아 훈련 중 휴식 시간에 전우들끼리 나누어 피웠던 화랑담배는 그 어떤 꿀맛보다 달콤했습니다.
1년에 15일간의 정기 휴가, 휴가증만 지급될 뿐 여비는 없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서울 용산역 TMO(군인 여행장병 안내소)를 거쳐, 통일호 열차 군인 전용칸에 다섯 시간을 앉아 고향인 목포역에 도착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다시 고향 마을로 돌아가면, 우리 어머니와 누나, 동생들이 그 얼마나 반가워하며 좋아했던지! 그 순박했던 미소와 환영은 지금도 가슴을 울립니다.
하지만 세월은 무정했습니다. 지금은 어머니도, 누나도, 남동생들도 교통사고와 암으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버려 너무 보고 싶고 아쉽습니다.
문득 1980년 그 당시, 사병들 봉급이 지금처럼 10만 원이라도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군 생활 34개월 동안 저금이라도 해 전역 후 힘들게 합격했던 회계학과에 복학했을 텐데. 돈이 없어 꿈을 접고 공무원 시험을 치러 공직의 길을 걸었지만, 그 놓쳐버린 청춘의 기회는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군인 사병들이 월 200만 원 가까이 받아 대학 학자금으로 쓴다는 소식을 들으면, 80년대 군대와 지금의 군대가 이룬 괄목할 만한 발전에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스물한 살, 노랗게 빛나는 작대기 하나,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살던 시절. 밤잠을 설쳐가며 교대로 보초(초병) 근무를 섰습니다. 실탄을 수령하여 M16 소총에 뾰족한 대검을 착검하고, 탄약 케이스에 예비 실탄을 담아 허리띠에 찼습니다. 새벽 두 시에 일어나 전망대나 위병소에서 섰던 그 긴장된 근무는 병영 생활의 가장 강렬한 추억입니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국방색 식판에 배식받은 저녁을 먹고 난 뒤, 밤 아홉 시 일석점호가 시작되기 전 한두 시간의 자유시간. 나는 그 귀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준비한 공무원 수험 서적을 틈틈이 독학하며 전역 후의 안정을 준비했습니다. 그 절박함과 간절함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전라도 장흥에서 완행버스로 광주역에 도착해 야간 군용 열차를 타던 그 쓸쓸했던 입영 길. 부모 형제와 친구, 연인들이 울음바다가 되어 작별하는 광경을 뒤로하고, 아무도 와주지 않은 쓸쓸하고 외로운 길을 홀로 갔습니다. 밤 기적소리와 함께 미동하던 군용 열차 안에서, 56kg의 왜소했던 육신은 조국의 간성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논산 훈련소, 부산 병기학교를 거쳐 강원도 최전방 을지부대에서 "안되는 것도 되게 할 수 있다"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야전군인으로 만들어져 갔습니다.
34개월을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전우들의 이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류근식 대위, 한만희 중위, 백승근 중위, 이형호 중위, 경희대 출신의 이형호 하사, 산업은행의 전세영 하사. 부잣집 아들 정연칠 병장, 외환은행에서 온 박종은 병장, 조선대 경영학 최훈영 병장, 광주상고 최수준 병장, 그리고 가장 나이가 많았던 고향 동창 형님 정춘기 병장님. 두 달 늦은 졸병 어윤정 병장과 눈치 빨랐던 막내 정주진 병장까지.
45여 년이 지난 지금, 동부전선 인제 원통에서 3년 동안 나라를 지키고 고생을 함께 했던 그 전우들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지, 이 병장은 궁금하고 또 보고 싶습니다.
공직 생활 33년을 마무리하고 은퇴 후 인생 2막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3년 동안 젊고 용감하게 보냈던 34개월의 병영 생활은 이제 가슴 시린 추억과 그리움으로 젖어듭니다. 유격훈련, ATT, RCT 훈련, 휴전선 철책선 매복 근무, 혹한기 동계 훈련... 그 모든 아픔과 고통이 세월이 지나니 오히려 그리움이 됩니다. 사격 우수 사병으로 선발되어 칠성고개에서 야영하며 총탄을 집중했던 날들, 일병 때 받았던 모범 사병 표창의 영광까지.
이제 다들 70대가 되어가는 지금, 80년대 동부전선을 함께 누볐던 용감했던 전우들이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함께 울고 웃던 군대 생활의 추억들이 잊히지 않고 자꾸 생각나는 것은, 결국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청춘의 꽃을 그곳에 피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아침, 자전거를 타보니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바람이 서늘합니다. 문득 **'전선야곡'**과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라는 군가 가사가 떠오릅니다. 군가를 들을 때마다 용감하고 씩씩했던 20대 초반의 젊은 군인 생활로 되돌아간 것처럼, 내 안의 젊은 힘이 다시금 솟아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운 전우들이여! 부디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