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도 잘 치지 못하고
스크린 골프 역시 늘 흉내만 낼뿐이지만,
은퇴 이후의 나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것들을
하나씩 다시 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느 날
삼십 년 가까이 몸담았던
옛 직장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출근을 위해 오르내리던 그 건물 앞에
이제는 아무 직함도 없이 서 있었다.
시간은 분명 흘렀는데
공기는 낯설지 않았다.
마침 십오 년 전 함께 근무하던
서로 마음이 통했던 후배를 만났다.
커피 한 잔을 사주고
삼십 분 남짓
지난 이야기들을 꺼냈다.
야근하던 시절,
사소한 사건들,
웃고 넘겼던 순간들이
자연스럽게 되살아났다.
이야기가 아쉬워
예전에 자주 가던
국민은행 지하,
사조참치 옆 당구장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공 굴러가는 소리만큼은
예전 그대로였다.
한 시간을 치고 보니
요금은 만 원이 나왔다.
후배는 자기가 내겠다고 했고,
나는 선뜻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괜히 후배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후배는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오천 원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서로 계산하려다
서로 물러나지 못한 채
결국 요금은
반반씩 나누어 냈다.
요금을 내려는
그 작은 실랑이가
왠지 마음에 오래 남았다.
돈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체면을 존중하던
그 시간이 좋았다.
당구를 치고 나와
예전에 자주 가던 참치집에도 들렀다.
정식 한 끼가 만오천 원.
세월이 흘렀지만
가격도, 분위기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언젠가
다시 후배들과
이곳에 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무 해 전의 후배는
이제 팀장이 되었고,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 또한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 베이붐 세대들이 은퇴를 하니
승진을 거듭해
과장, 국장이 되어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제야
‘세월이 빠르다’는 말을
조용히 실감하게 된다.
퇴직하고 나니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시간도, 비용도
서로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럼에도 이렇게
주머니를 조금씩 열며
기억을 나누는 만남은
여전히 따뜻하다.
(쉬는 날에도 당구장은 시니어 붐)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몸은 조금 피곤했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가벼웠다.
잠시나마
나이가 되돌아간 듯했고,
엔도르핀이 도는지
숨결도 한결 편안했다.
이런 하루가
인생 후반기에는
무엇보다 귀하다.
대단한 성취도,
거창한 계획도 없지만
사람과 시간을
기분 좋게 나누는 하루.
어릴 적,
학생 시절에는
당구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학생이거나 젊은이들이었다.
이제 초고령사회가 되다 보니
베이붐세대들이 다들 은퇴한 탓인지
당구장에는
젊은 층의 모습은 사라지고
검은 옷을 입은
노년층이 대부분이다.
시니어가 된 나 또한
마음 한켠이
울적하고 서글퍼진다.
그럼에도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