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장흥에 있어보니 시간이 먼저 말을 건다.
서울에서는 시계가 하루를 이끌었는데, 이곳에서는 햇빛과 바람이 하루를 데려간다.
아침은 느리게 오고,
저녁은 서둘지 않는다.
급할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마음을 편안하게 할 줄은,
막상 살아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아침이면 엿마지기논쪽으로 발길이 간다.
또랑물은 늘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어제의 물이 오늘의 물이 아니듯,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대밭옆 또랑가에 서 있으면 괜히 말수가 줄어든다. 이곳에서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
자연이 대신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장흥 사람들은 대체로 느긋하다.
인사를 나누는 데에도 서두르지 않는다.
“어디 가시요?”라는 물음 속에는 목적지가 아니라 안부가 담겨 있다.
처음에는 그 여유가 낯설었지만,
어느새 나도 그 속도에 맞춰 걷고 있다. 빨리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결론을 급히 내리지 않아도 되는 삶. 그게 이렇게 고마운 줄은 몰랐다.
시골이라고 해서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불편함보다 분명한 것이 있다.
계절이 또렷하고, 사람의 얼굴이 남는다.
봄이면 들녘이 먼저 소식을 전하고, 여름에는 매미 소리가 하루의 시작과 끝을 나눈다.
가을에는 벼가 고개를 숙이고,
겨울에는 마을 전체가 숨을 고른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사는 삶은, 생각보다 깊다.
내 고향 장흥에 있어보니,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
어린 시절, 논두렁을 걷던 풍경과
농약을 칠때
긴 호스가 감기지 않게 줄을 풀어주고 당겼던 일들과
어른들의 목소리,
저녁밥 짓는 연기 같은 것들이
문득문득 되살아난다. 도시에서는 잊고 지내던 기억들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든다. 아마도 풍경이 비슷해서
그럴것이고, 마음이 조금 비어 있어서일 것이다.
밤이 되면 별이 무수히 많다.
이별은 나의 별
저별은 너의 별
쏱아질것 같은 밤하늘의 은하수불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하늘을 쳐다보던
그때가 그립다
빛이 적어서가 아니라, 올려다볼 여유가 있어서
더 많아 보인다.
텔레비전을 끄고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었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하루가 충분하다.
오늘 하루 무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잠자리에
들 수 있다.
고향에 있다 보니, 고독하고 쓸쓸할때가 많아도
인생이 꼭 앞으로만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잠시 멈추어도 되고, 되돌아보아도 된다.
속도를 늦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이곳은 나에게 그런 삶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장흥에서 하루씩 더 머무른다
크게 남길 것은 없어도,
조용히 마음을 정리하면서
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