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숱한 고비들을 넘기며 어느덧 칠십 고개에 다다르니, 이제 몸의 시계는 자꾸만 뒤로 흐르는 모양이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새벽 3시나 4시쯤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다시 잠을 청해보려 눈을 감아도, 가난했지만 웃음만큼은 넉넉했던 시골집의 풍경과 이제는 만질 수 없는 얼굴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 풍경의 중심에는 늘 손끝이 야물었던 내 남동생 금채가 있다.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녀석. 책가방을 메고 앞니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던 꼬마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내 기억 속 동생은 영원히 서른을 넘기지 못한 청년의 모습으로 박제되어 있다.
금채는 참으로 신통한 재주를 가진 아이였다. 고장 난 경운기부터 털털거리던 자전거, 소리 나지 않던 라디오와 멈춰버린 시계까지, 녀석의 투박한 손만 거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것처럼 살아 움직였다. 동네 사람들은 쓸만한 물건이 고장 나면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금채야, 이것 좀 봐다오” 하며 우리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녀석은 그게 무슨 큰일이라도 되는 양, 밤을 새워서라도 기어이 고쳐놓고는 쑥스럽게 웃어 보이곤 했다.
내가 우체국 공무원으로 일하던 시절, 내 직장이던 우체국에서 하루 일당을 받아가며 꼬박 24시간씩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던 녀석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속이 여미어진다. 남들은 적당히 요령을 피울 법도 한데,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일하던 그 성실함 덕에 내 상사들로부터 “자네 동생 참 보물일세”라는 소리를 듣게 해주었다. 그 모습이 대견하고도 안쓰러워 내 권유로 시작한 공무원 시험에 당당히 합격해 장흥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하게 되었을 때,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에 피어났던 그 환한 웃음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운명은 어찌 그리도 가혹한 것인지. 1997년의 그 잔인했던 봄날을 나는 지금도 원망한다. 임용된 지 고작 3년,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결혼도 하지 못한 내 동생은 퇴근길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7남매 중 가장 듬직하고 정이 많던 녀석이 가장 먼저 떠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금채를 보낸 후 어머니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했다. 틈만 나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워하시던 어머니마저 10년 전, 동생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떠나셨다. 이제는 내 곁에 없는 누나와 두 남동생, 그리고 어머니까지. 명절이 다가오면 텅 빈 마당을 보는 내 가슴은 갈가리 찢어지는 통증을 느낀다.
가끔은 너를 향한 그리움이 원망으로 변하기도 한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만 있었다면, 이제 정년이 한 2년 정도 남아 교도소장이나 과장이 되어 늠름한 모습으로 내 앞에 앉아 있었을 것인데. 네가 살아만 있었다면, 그 야속한 작은아버지가 네 목숨값인 사망보험금에 손을 대는 기 막힌 일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 집안 형편이 이토록 무너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두고만 보셨던 고지식한 아버지가 때로는 너무 원망스럽고 밉기도 하단다.
이 새벽, 찻잔에 서린 온기를 빌려 다시 한번 동생의 이름을 불러본다.
“금채야, 거기선 고장 난 것들 고치느라 밤새지 말고 그저 편히 쉬고 있느냐.”
추운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면, 삽자루를 들고 선산에 가야겠다. 거기 잠든 네 묘소 앞에 앉아, 살아생전 나누지 못했던 밀린 이야기들을 원 없이 쏟아내고 싶다. 20대 후반에 멈춰버린 너를 향해 원망 섞인 그리움을 전하며, 못난 형의 용서를 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