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집과 작두

by 자봉

굽이굽이 흐르는 세월을 따라 고향 집 마당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150년의 침묵을 견뎌온 고택의 묵직한 기운이다. 서너 번의 개축과 신축을 거치며 집은 마치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듯 그 모습을 바꾸어 왔지만, 이 땅에 깊게 뿌리 내린 우리 삶의 궤적만큼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다.

나의 유년 속 집은 나지막한 초가집이었다. 큰방에는 대나무 빗살에 창호지를 정성껏 발라 만든 얼굴만한 작은 문이 있었고, 그 곁엔 사람들의 온기가 오가는 방문이 나란히 자리했다. 국민학교 시절, 십 리 길 산등성이를 넘어 섬뜩한 묘지들 옆을 지나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노란 볏짚 지붕 아래서 돼지와 닭들이 내는 소리가 정겨운 합창처럼 마당 가득 울려 퍼지곤 했다.

그러다 새마을 사업의 바람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던 날, 정들었던 초가 지붕은 번듯한 양철지붕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집이 변해가는 모습은 곧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얼굴이기도 했다. 마당 한편에는 떫은 감이 주렁주렁 열리던 감나무와 사철 푸른 대나무 숲이 집을 지켰다. 바람이 불면 대숲은 서걱거리며 집안의 비밀을 속삭였고, 가을이면 가지 끝에 매달린 붉은 감들이 조상님들의 인자한 눈매처럼 우리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 시절 나의 하루는 지게와 함께 시작되어 지게와 함께 저물었다. 부모님을 도와 밭에 뿌릴 퇴비를 만드는 것은 집안의 가장 큰 의례였다. 낮이면 어린 어깨에 지게를 짊어지고 산에 올라 낫으로 풀을 베었다. 지게 작대기가 어깨를 묵직하게 파고들 때면 땀방울이 눈가에 맺혔지만, 그것은 성장의 통증이기도 했다. 베어 온 풀을 마당 모퉁이 논사밭에 모아두면 아버지는 작두에 풀을 넣고 나는 힘차게 작두질을 했다.

서슬 퍼런 작두날에 풀이 잘려 나갈 때마다 번지던 금속음과 싱싱한 풀 내음은 어찌나 상큼했던지. 작두날을 내리누르며 풍요를 꿈꾸던 그 투박한 손길들이 모여 5대의 삶을 꿋꿋하게 이어온 것이다.

고조부님부터 증조부님, 조부님, 그리고 아버지까지. 이 집의 문턱에는 그분들의 고단했던 삶과 가족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닳고 닳은 흔적으로 남아 있다. 가축의 보금자리를 허물고 새로 짓기를 반복하며 집은 조금씩 커지고 단단해졌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이라는 변치 않는 기둥이 서 있었다.

우여곡절 많았던 150년.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던 소년은 이제 백발이 되어 고향 집 마당에 섰다. 이제는 작두 소리도, 닭 울음소리도 희미해졌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소리만큼은 여전히 150년 전 그날처럼 "고생했다, 어서 오너라" 하며 나의 등을 다독여준다.

나의 탯줄이 묻힌 곳, 나의 유년이 자란 곳, 그리고 조상님들의 혼이 깃든 이 집은 이제 나에게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가장 고귀한 지게이며,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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