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걸린 달력이 어느새 홑치마처럼 얇아졌다. 덩그러니 남은 마지막 한 장을 바라보니, 시간은 발이 달린 것이 아니라 날개가 달린 모양이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속도는 체감 시속을 높여간다더니,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 퇴직한 지도 벌써 8년째에 접어든다. 이제 며칠 후면 정든 달력을 떼어내고,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달력을 벽에 걸어야 할 때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참으로 바쁘게도 살았다. 현직에 있을 때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마음 한구석에 밀어두었던 꿈들이 이제야 기지개를 켠다.
글을 써서 내 이름 석 자 박힌 책 한 권 세상에 내놓고 싶고, 기타 줄을 튕기며 노래를 부르고 싶기도 하다. 잊어버렸던 영어 회화를 다시 입 밖으로 내뱉어보고 싶은 욕심도 여전하다.
물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배워도 써먹지 않으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기억력이 야속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 후반기의 숙명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일이다.
잊기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그 찰나의 즐거움이 나를 살아있게 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고등학교 동창 재균이와 장근이를 만나기로 했다. 스크린 골프 한 게임 치고 뜨끈한 점심 한 그릇 나누기로 한 약속을 떠올리니 절로 미소가 번진다.
부르면 달려와 줄 친구가 있고, 함께 휘두를 골프채가 있으니 "참 나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자각이 가슴을 데운다.
인생을 농사에 비유하자면 지금은 겨울의 문턱일 것이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땀 흘려 가꾸며,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거친 농부. 그 농부가 수확물을 창고에 가득 쌓아두고 따뜻한 아랫목 구들장에 몸을 뉘어 편히 쉬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복된 인생이 아니겠는가.
돌이켜보면 우리 세대의 겨울은 마냥 쉬는 계절만은 아니었다. 눈이 함박눈이 펄펄 쏟아지는 날에도 지붕 위에 올라가 볏짚으로 이엉을 엮고 지붕을 단장하느라 손끝이 아렸다. 그 시린 세월을 견디며 우리는 조국 근대화의 길을 닦았다. 6.25 전쟁통에 탱크 한 대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가난한 나라가, 이제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자 무기를 수출하는 군사 강국이 되었다.
정치적 공과를 떠나, 굶주림을 끊어내고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과 대기업을 육성했던 결단이 오늘날 우리 후손들이 누리는 교육과 풍요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 이 격동의 성장을 함께 일구고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이다.
다만, 오늘날의 정치가 국민의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후진적인 모습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볼 때면 깊은 탄식이 새어 나온다. 정치가 조금만 더 선진화된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나라가 될 텐데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창밖의 찬바람이 매서워질수록 내 마음의 온도는 오히려 높아진다.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은 아직 태울 열정이 남았다는 것이요,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삶이 향기롭다는 뜻이다.
내일 친구들과 나눌 호쾌한 스윙 한 번에 올 한 해의 아쉬움을 날려 보내려 한다. 인생의 겨울은 끝이 아니라, 따뜻한 아랫목에서 다음 봄을 꿈꾸는 가장 평온한 축제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