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황혼녘에 서서 지나온 굽이길을 돌아보니, 유독 시리고 아픈 바람이 불어오는 지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서슬 퍼런 공직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세상 모든 것이 내 편인 줄만 알았던 그 찬란했던 청춘의 초입이다. 1985년, 한 달 꼬박 밤잠 설쳐가며 일해 손에 쥐었던 봉급 10만원.
국가에 봉사한다는 자부심이었으며, 젊은 청년이 결혼하기 위한 단꿈을 꾸면서 내일을 준비하는 등불이었다.
그러나 그 등불을 단숨에 꺼트리고 나를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장에서 함께 뒹굴며 우정을 맹세했던 동창이 어느 날 화려한 사장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는 옛정이라는 가장 달콤한 무기를 휘두르며 나의 순진함을 파고들었다. 사업을 키워보겠다며, 친구 좋다는 게 무엇이냐며 내민 손을 나는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보증을 서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친구의 달콤한 거짓에 속아 빌려줬다
내 몸의 피 같은 돈을 그에게 빌려주었는데 하던
사업을 접고 짐을 빼 도망가고 잠적해버렸다
그것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올가미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사기꾼의 수법은 예나 지금이나 판박이다. 감언이설로 희망을 심어준 뒤, 단물이 다 빠지면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다. 그가 도망친 자리에는 빚쟁이들의 고함과 차가운 법원의 종이들만 남았다. 매달 꼬박꼬박 나오던 소중한 월급봉투에는 압류의 딱지가 붙었다
공무원이라는 직책 때문에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하고, 속으로만 피눈물을 삼키며 그 모진 세월을 견뎠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은 육신의 병보다 깊었고, 믿음의 대가가 파멸이라는 사실은 영혼을 좀먹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신문 지상을 도배하는 사기 범죄의 풍경은 어찌 이리도 바뀌지 않았단 말인가. 오히려 범죄의 기술은 교묘해졌고, 법망은 그들을 비웃듯 더욱 헐거워졌다. 2015년 3천 명 수준이던 자유형 미집행자가 10년 새 두 배 가까이 늘어 6천 명을 넘어섰다는 통계를 보며, 나는 우리 사법 체계의 죽음을 본다. 실형을 선고받고도 거리를 활보하고, 재판을 받는 도중에도 추가 범죄를 모의하며, 범죄 수사망이 좁혀지면 미얀마나 라오스처럼 범죄인 인도 조약이 없는 나라로 줄행랑을 친다.
그들이 해외로 도피해 피해자의 피눈물로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는 동안, 전세 사기를 당한 청년들은 고시원을 전전하고 투자 사기에 전 재산을 날린 노인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한다. 가해자의 인권은 금쪽같이 대접받으며 불구속 재판의 특혜를 누리는 사이, 피해자의 인권은 무너진 삶의 파편 아래 깔려 신음한다. 썩어빠진 법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사기 범죄를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안일한 행정이 이 괴물들을 키운 것이다. 사기는 한 사람의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인간에 대한 기본적 신뢰를 말살하는 '사회적 살인'이다.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나를 그토록 고생시켰던 그 동창과 선배가 지금 경기도 일산 어딘가에 전원주택을 짓고 별장까지 드나들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들이 가로챈 돈을 불려 건물을 사고, 땅값이 올라 수십억 자산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그 참담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누구는 정직하게 살아온 대가로 낡은 육신과 멍든 가슴을 얻었는데, 누구는 남의 눈에 피눈물을 내고도 골프채를 휘두르며 해외여행을 다닌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자식들에게 가르쳐야 할 정의인가.
정치인들 또한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법을 고쳐 사기꾼들이 다시는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강력한 징역형을 때려야 하건만, 그들 역시 양파 껍질처럼 벗겨지는 비리의 온상이 되어있으니 누굴 믿고 나라의 기틀을 맡기겠는가. 사이코패스 같은 범죄자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직무 유기다. 10년, 20년의 징역이 아니라, 피해자가 입은 고통의 시간만큼 그들을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
사기꾼들이 발붙일 곳 없는 나라, 남을 속이면 반드시 패가망신한다는 공포를 심어주는 법 집행이 절실하다. 40년 전 내가 겪었던 그 지옥 같은 시간이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전세 사기라는 이름으로 반복되는 것을 보며 탄식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사법부와 정치권은 피해자의 찢어진 가슴을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보라. 사기꾼들의 화려한 도피 생활을 끝내고, 그들이 숨겨둔 단돈 일 원까지 찾아내 피해자에게 되돌려주는 진정한 정의가 바로 서는 날을 나는 죽기 전까지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