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운동의 메아리

by 자봉

스산한 겨울바람이 옷깃을 파고들 때면, 마음의 시계추는 어느덧 반세기 전 학운동의 빛바랜 골목길로 되돌아간다. 최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불빛 축제를 다녀왔다. 화려한 전구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늘어선 마켓마다 먹거리와 물건들이 넘쳐나는 그 풍요로운 풍경 속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50년 전의 가난과 마주했다. 야시장의 한 귀퉁이에서 찹쌀떡을 파는 가게를 본 순간, 억눌러두었던 옛 기억의 실타래가 술술 풀려나온 것이다.

나의 십 대 중반은 학운동의 어느 허름한 자취방에 머물러 있다. 고등학생이라 하면 돌도 씹어 먹을 만큼 왕성한 혈기가 있을 나이였으나, 당시의 나는 늘 비어있는 위장과 싸워야 했다. 밤 10시가 되면 정적을 깨고 골목 어귀에서부터 들려오던 소리, “찹쌀떠어억— 찹쌀떡—” 하는 장수의 외침은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내 방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그 길게 늘어지는 여운은 허기진 소년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내곤 했다. 돈이 없으니 그것은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낡은 수도꼭지를 틀어 쏟아지는 찬 수돗물로 빈속을 채우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때 마신 물은 배고픔을 달래주기보다 오히려 텅 빈 마음을 더 서늘하게 적셨다.

자취방으로 향하던 길은 또 얼마나 고단했던가. 시내버스에서 내려 숭의실업고등학교를 지나 증심사 쪽으로 걷는 길은 가로등조차 드문 비포장도로였다. 여름이면 개천가에 빨래하던 아낙네들이 모여 있었고,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흙길 위로 칼바람이 몰아쳤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당장의 추위를 견뎌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는 생계를 위해 신문 배달을 시작했다. 금남로 ㅇㅇ일보 윤전기에서 막 인쇄되어 나온 신문 뭉치의 기름 냄새를 맡으며 보급소로 향했다. 홍보 전단지를 끼워 넣고 팔꿈치 안쪽에 신문을 단단히 끼운 채 골목을 누빌 때, 어둠 속에서 짖어대던 진돗개들은 소년의 발걸음을 늘 움츠러들게 했다. 학운동에서 증심사 입구 양계장까지 이어지던 그 길은 내게 너무나 험난한 세상의 장벽이었다.

하지만 그 고단한 세월 속에도 푸르른 낭만은 있었다. 월산동에서 중학교 동창 백중이와 자취하던 시절, 우리는 사설 독서실에 앉아 밤늦도록 코끝을 비비며 공부했다. 무진중학교 앞 긴 골목길을 걸을 때면, 군청색 교복에 하얀 목칼라가 눈부시던 청순한 여고생이 지나가곤 했다. 말 한마디 걸지 못하고 가슴만 두근거렸던 그 순수한 떨림.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도 나를 버티게 한 것은 어쩌면 그런 소박한 젊음의 풍경들이었을지도 모른다.

10여 년 전, 졸업 40주년을 기념해 다시 찾은 학운동은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먼지 날리던 길엔 아스팔트가 깔렸고, 증심사 입구는 깨끗한 관광지가 되었다. 눈물을 삼키며 신문을 돌리던 험한 길들이 명소가 된 것을 보며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실감했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찹쌀떡 정도는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그 시절의 골목길을 서성인다. 사실 그 지독한 고생을 다시 하라고 한다면 손사래를 칠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번만이라도, 밤하늘에 울려 퍼지던 그 찹쌀떡 소리를 들으며 미래를 꿈꾸던 ‘젊음’만큼은 다시 한번 붙잡아보고 싶다.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 이제는 사라진 송정리 동부파출소와 육교, 월산동의 낡은 자취방들을 추억해 본다. 찹쌀떡 하나에 담긴 눈물과 희망, 그리고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푸르렀던 청춘이 오늘 밤 겨울바람을 타고 내 곁을 확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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