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향로봉 과 전우들

젊음과 병영의 추억

by 자봉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

155마일 휴천선 철책 경계를 책임지는

향로봉 정상에 올랐을 때, 바람이 먼저 우리를 맞았다.


능선을 타고 올라온 바람은 철모 아래로 파고들었고, 땀으로 젖은 군복은 금세 식어 갔다.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자 산은 말이 없었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줄로 섰다.


1981년, 육군 보병 제12사단 장병들. 병기보급행정과 총포, 차량정비를 맡았던 우리부대는 그날 향로봉 정상에서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군 생활의 대부분은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흘러갔다.


병기근무대는 늘 전면에 서는 부서가 아니었다. 훈련장에 나가 구령을 외치는 일도, 총을 들고 돌격하는 일도 우리의 몫은 아니었다. 대신 우리는 그 모든 일이 문제없이 이루어지도록 뒤에서 받치는 사람들이었다. 총 한 자루, 탄약 한 발, 차량 한 대가 제때, 정확히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그 준비가 어긋나면 누군가는 다칠 수 있었고, 상황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병기 보급행정은 숫자와의 싸움이었다.

장부의 한 줄, 서류의 한 칸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숫자가 맞지 않으면 현장이 흔들렸다. 우리는 종이 위의 숫자와 창고 안의 물자가 정확히 일치하도록 끝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가장 좋은 하루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배웠다.

총포 업무는 더 말이 없었다.

총은 말을 하지 않지만, 손끝에는 모든 신호를 남겼다. 분해하고, 닦고, 다시 조립하는 반복 속에서 작은 이상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총열의 감촉, 부속의 마찰, 조립 후의 균형감. 그것들은 설명서보다 먼저 몸에 새겨졌다. 총이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은, 결국 누군가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차량정비는 몸으로 하는 일이었다.

엔진 소리 하나, 미세한 진동 하나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찾아내는 일은 손을 더럽히고, 몸을 낮추는 일에서 시작됐다.

기름 냄새가 배어 있는 작업장,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점검. 차량이 문제없이 움직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루를 마칠 수 있었다.

향로봉 정상에서 찍은 사진 속 우리는 모두 철모를 쓰고 소총을 들고 있다.

하지만 그 소총은 전투의 상징이라기보다,

우리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할 대상에 가까웠다.

사진 속 얼굴들에는 웃음이 많지 않다. 대신 묘하게 단정한 표정이 있다.


각자의 속마음은 달랐을 것이다. 고향 생각을 하던 이도 있었을 것이고, 제대 날짜를 손꼽아 세던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같았다. 맡은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묵묵한 다짐이었다.

향로봉의 높이는 우리를 작게 만들었다.


산 아래로 펼쳐진 풍경 앞에서, 개인의 고민이나 불평은 잠시 자리를 잃었다. 그 작아짐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하나가 되었다. 계급과 출신, 살아온 사연은 잠시 뒤로 물러나고, 같은 부대, 같은 근무대라는 이름만 남았다. 사진을 찍는 그 짧은 순간에도,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른 뒤, 그 사진을 다시 꺼내 보면 기억은 더 또렷해진다.

이름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도 있고, 표정만 어렴풋이 남은 얼굴도 있다. 함께 밤을 새우며 정비를 마치고 내려오던 길, 말없이 공구를 건네주던 손, 짧은 농담 하나에 피로가 풀리던 순간들. 그 모든 장면이 사진 한 장 뒤편에서 조용히 살아난다.


이제 군복은 오래전에 벗었다.

총도, 장부도, 공구도 손에서 놓은 지 오래다. 하지만 병기근무대에서 배운 태도는 삶 속에 깊이 남아 있다. 보이지 않는 자리일수록 더 정확해야 한다는 것, 기록과 점검, 확인이 결국 사람을 지킨다는 사실이다. 그 습관은 군을 떠난 뒤의 삶에서도 나를 여러 번 붙잡아 주었다.

돌아보면 향로봉 정상은 단순한 지리적 높이가 아니었다.

그곳은 젊은 날의 내가 책임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한 번쯤 온몸으로 느꼈던 자리였다. 말없이 맡은 일을 해내던 시간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으려 했던 마음. 그 모든 것이 그날의 바람과 함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1981년, 향로봉 정상.

육군 보병 제12사단 병기근무대 장병들이 함께 서 있던 그 시간은 이제 과거가 되었지만, 그때 배운 자세만큼은 아직도 현재형이다. 인생의 어느 자리에서든,

나는 그때처럼 묻는다.

지금 내가 맡은 일은 흔들림 없이 준비되어 있는가.

아마도 그것이, 향로봉이 내게 남긴 가장 오래된 질문일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년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들인 어윤정병장 이대실 병장 정주진 병장 이형호 하사 최훈영 병장 최수준 병장 송슌용 병장. 최상문 병장. 이석주 병장

산업은행 재직중 입영한 선린상고 출신의 전세영 하사 그대 들이 보고싶고 그리웁다

10년 강산은 네번씩이나 바뀌었는데 그리운 옛 전우들은 지구촌 어느하늘 아래에서 병오년 새해 2026년을 맞이했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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