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각기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계를 하나씩 품고 산다. 어떤 이는 이른 봄의 잔설이 채 녹기도 전에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리며 세상을 향해 자신을 증명하고, 어떤 이는 한여름의 뙤약볕을 온몸으로 견뎌낸 뒤에야 비로소 가을의 갈무리처럼 묵직한 결실을 본다.
나의 시계는 남들보다 조금 느리게 돌아가는 태엽을 가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 느릿한 바늘이 가리켰던 시간은 결코 멈춰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의 뿌리를 대지 깊숙이 내리기 위한 인고의 과정이었고, 거친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옹이를 내 안에 심어가는 시간이었다.
나의 청춘은 ‘밑바닥’이라 불리는 거친 현장들의 연속이었다. 동년배들이 강의실에서 미래를 설계하며 낭만을 노래할 때, 나는 어깨를 짓누르는 신문 배달 가방을 메고 도시의 골목을 누볐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기 전, 액자를 만드는 표구사에서 밀가루를 풀어 풀을 만들던 시다 생활로부터 기사식당의 분주한 소음 속에서 땀 흘리며 그릇을 나르고 닦던 시간까지, 삶은 늘 나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때로는 책 외판원이 되어 차가운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고, 청소와 경비 업무를 하며 타인의 시선 밖에서 묵묵히 나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 40여 년의 세월은 말 그대로 ‘피눈물’의 기록이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학문에만 정진하는 이들을 부러워할 겨를조차 없었다. 오늘을 버텨내기 위한 노동 끝에 겨우 손에 쥔 푼돈으로 책 한 권을 살 때, 나는 비로소 숨을 쉬었다. 돈이 없어 대학 문턱을 넘지 못했던 서러움이 북받칠 때마다 나를 붙들어 준 것은 ‘공부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먼지 자욱한 작업장에서, 혹은 고단한 퇴근길 버스 안에서 펼쳤던 책장은 세상이 나에게 허락한 유일하고도 고귀한 안식처였다.
스물여섯, 남들보다 조금 늦은 출발이었지만 당당히 공직의 길에 들어섰다. 그 후 35년간 철도와 우체국 등 서너 개의 기관을 거치며 공직자로서 소명을 다했다. 안정된 직장을 얻었음에도 배움에 대한 갈증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낮에는 민원인과 씨름하고 밤에는 방송대 교재를 펼치며 잠을 쫓았다.
50대에는 학점제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해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마침내 손에 쥔 4년제 대학 졸업장은 단순한 종이 한 장이 아니었다.
50대 후반에 늦은 나이에 시작한 지방자치학 대학원 공부도 재미 있었다
그것은 가난과 시련에 빼앗겼던 ‘나의 계절’을 되찾아가는 눈물겨운 여정의 마침표였다.
우리는 늘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결승선을 그려두고 달린다.
행복이라는 것이 마치 그 선을 통과해야만 주어지는 훈장인 양, 오늘의 숨가쁨을 당연한 희생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인생은 누군가와 순위를 다투는 경주가 아니라, 저마다의 보폭으로 걸어가는 고요한 산책에 가깝다는 것을 말이다.
멀리 숲을 보라.
모든 꽃이 일제히 피어나는 법은 없다.
성급한 봄바람에 고개를 내미는 꽃이 있는가 하면, 시린 서리를 맞으며 비로소 고결함을 드러내는 국화도 있다.
꽃이 피는 속도가 다르다고 해서 그 빛깔이 흐릿하거나 향기가 옅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신의 계절이 아직 당도하지 않았을 뿐, 지금의 속도가 당신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결정짓지는 못한다. 실패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지도를 확인하는 신호일 뿐이며, 넘어짐은 다시 일어설 근육을 단단하게 다지는 과정일 뿐이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고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소중하다. 은퇴 후 비로소 마주하게 된 여유와 소소한 취미 생활은 내 인생이 나에게 주는 선물 같다. 모레면 은퇴자들과 함께 스크린 골프장에서 ‘인생샷’을 날릴 기분 좋은 약속이 기다리고 있다. 필드 위를 가로지르는 하얀 공처럼, 나의 노년도 시원하고 경쾌하게 뻗어 나가길 기대해 본다.
거창한 성공이 아니어도 좋다. 타인의 시계에 나를 맞추지 않고, 지금의 나를 온전히 믿으며 주어진 오늘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개화(開花)임을 나는 믿는다.
나의 계절은 이제야 비로소 가장 찬란한 빛으로 무르익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