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쓴 언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by 자봉

스페인의 어느 지혜로운 이는 말했다. 화살은 심장을 관통하지만, 매정한 말은 영혼을 관통한다고.


오늘 나는 그 날카로운 말의 화살들이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헤집어놓는 소리를 듣는다.


종손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온 세월 동안, 내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가문의 전통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의 도리였고, 입에서 나오는 말의 품격이었다.

품격(品格)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입 구(口) 자 세 개가 모여 이루어진 그 형상은, 결국 사람이 내뱉는 말들이 쌓여 그 사람의 격을 만든다는 엄중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군자(君子)의 군(君) 자 역시 입을 다스리는 자만이 우뚝 설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나의 가장 가까운 뿌리라 믿었던 가족들은 어떠한가.

고향 선산에 올라 산소 앞에 서서 조상님께 술 한 잔 올리려 다가가는 내 손길을 아버지는 차갑게 밀쳐내신다.


종손임에도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둘을 낳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평생 지켜온 성의와 정체성은 한순간에 부정당하고 허위사실로 고발까지 당해 경찰서와 검찰에 출두해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무혐의에 누명도 벗었다


술잔보다 먼저 바닥에 쏟아진 것은 나의 자존심이었고, 내 영혼의 눈물이었다. 작은아버지들의 말은 더욱 시퍼런 칼날이 되어 돌아온다. "느그 아버지가 너가 아들이 없어 종손자격을 박탈시켰는데, 네가 무슨 종손이냐"며 던지는 막말들은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내 가슴에 박혀 생명의 씨앗이 아닌, 독이 든 가시가 된다.



말은 종이에 쓰는 글과 달라서 찢어버릴 수도, 지울 수도 없다. 한 번 내뱉어진 말은 바이러스처럼 번져 관계를 좀먹고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조지 오웰의 말처럼 타락한 생각은 언어를 타락시키고, 그 타락한 언어는 다시 인간의 영혼을 오염시킨다.

1997년 고향근처에서 운전부주의 교통사고로 먼저 떠난 남동생들의 사망보험금까지 몰래 가로채려 하고,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허위사실로 투서를 했던 그 탐욕스러운 언어와 행동들 앞에서, 나는 과연 가족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투서결과는 모두 다 허위사실로 무혐의로 끝났지만 이러한 욕망된 생각들이 언어를 타락시킨 것일까,

아니면 이미 타락한 생각이 그런 짐승 같은 언어를 낳은 것일까.


말을 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한 번 후회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때 내뱉은 말은 아흔아홉 번의 후회를 남긴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혈육들은 그 한 번의 후회조차 느끼지 못한 채, 오늘도 나를 향해 잔인한 언어를 발설한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진정한 품위란 결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타인의 실수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비록 아들이 없어 멸시받고, 재물 앞에 정직을 저버린 이들에게 조롱당할지언정, 나는 그들처럼 타락한 언어로 맞서지 않으려 한다.


입을 다스리지 못해 소인배의 길로 추락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오히려 침묵 속에 더 깊은 품격을 쌓으려 노력한다.

내 딸들에게는 '아들이 없어도 충분한 종손'인 아버지가 되고 싶다.

허공에 쓰는 나의 언어가 비록 지금은 고통의 신음일지라도, 훗날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생명의 씨앗이 되기를 소망한다. 뒤에서 할 수 없는 말은 앞에서도 하지 말라는 그 엄격한 가르침을 거울삼아, 나는 오늘도 상처 입은 영혼을 추스르며 다시금 술잔을 닦는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의 마음이 변해도, 정직한 말 한마디의 힘은 영원하다는 것을 나는 나의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다.


그것이 오늘 내가 이 지독한 스트레스와 억울함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유일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입을 닫고 자중하고

침묵하며 살다 보면 먼저 가신 조상님들과 하늘이 진실을 알고 있어 나에게 위로를 해줄 것이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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