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피어난 묵향

by 자봉

거실 벽면 한가운데, 묵직한 존재감으로 자리 잡은 표구 한 점이 있다.

집안의 화려한 장식품들 사이에서도 유독 시선을 붙드는 것은 매끄러운 기성품이 지닌 세련미가 아니라, 거칠고 투박한 듯하면서도 힘 있게 뻗어 나간 먹의 줄기들이다.


그것은 장인어르신께서 그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오직 홀로 붓을 잡고 독학으로 일구어내신 인고의 산물이다.

하얀 화선지 위에 정성껏 써 내려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다섯 글자. 매일 아침 거실로 나설 때마다 마주하는 그 글귀는 이제 단순한 장식을 넘어, 우리 집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는 든든한 기둥이 되었다.


검은 먹물로 한 자 한 자 눌러쓴 글씨 옆으로는 아내와 나의 이름,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낙관 옆에 적힌 날짜를 보니 ‘경인년(2010년) 입동 즈음’이라 기록되어 있다. 찬바람이 창틀을 흔들기 시작하던 그 무렵, 어르신은 어떤 마음으로 벼루를 갈고 먹을 만드셨을까.

작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붓을 쥔 어르신의 손끝에 담겼을 간절한 기도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듯하다.


당신의 자식들이, 그리고 그 자식들이 이룬 가정이 세상이라는 거친 풍파에 흔들리지 않기를,


오직 화목이라는 단단한 울타리 안에서 평온하기만을 바랐을 그 간절함 말이다. 그것은 글씨라기보다 차라리 자식들의 삶 위에 덧입혀준 방패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 글귀를 마주할 때면 고마움 뒤로 코끝 찡한 그리움이 함께 밀려온다. 글씨가 쓰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곁을 떠나신 장모님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60대 초반, 아직은 삶의 황혼을 즐기기에도 이른 나이에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는 비보가 되어 날아들었다.

만약 그때 그 가혹한 사고만 없었더라면, 지금쯤 두 분은 원앙처럼 다정하게 파크골프장을 누비고 계셨을 것이다. 어르신이 붓을 잡으시면 장모님은 곁에서 묵묵히 먹을 갈아주며, 다 써 내려간 글씨 위에 따스한 눈길을 보태셨을 텐데. 집안 곳곳에 스며있는 장모님의 빈자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고 허전하게 다가와 가슴 한편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간다.



홀로 남겨진 장인어르신은 그 적막한 시간을 붓글씨와 파크골프라는 취미로 이겨내고 계신다. 텅 빈 집안에 고요가 내려앉을 때마다 어르신은 스스로 먹을 갈고 붓을 드셨을 것이다. 당신의 몸을 스스로 보살피며 강건하게 생활하시는 모습이 사위 입장에서는 더없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뒷모습이 아릿해 고개를 떨구게 된다.


홀로된 시간을 외로움이라는 늪에 내맡기지 않고, 서예의 정중동(靜中動)속에서 삶의 무게를 견뎌내고 계시는 것임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르신에게 붓글씨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상실의 아픔을 다스리고 남은 생을 단정하게 정돈하는 수행이었으리라.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그 평범하고도 위대한 진리를, 어르신은 붓끝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장인어르신이 선물해주신 이 표구는 단순한 서예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지켜내야 할 약속이자, 먼저 떠나신 장모님의 몫까지 더 많이 웃고 행복하게 살라는 어르신의 마지막 당부와도 같다.

오늘도 나는 우리 집 거실의 글귀를 손으로 한 번 더 쓸어보며 다짐한다.

어르신의 그 극진한 정성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가정을 더 따스하게 보살피고 사랑하겠노라고.

이제 거실에 서서 전화를 걸어야겠다.


당신이 써주신 글씨 덕분에 우리 집이 이토록 환하고 든든하다고, 그러니 부디 지금처럼만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큰 나무가 되어 강건해 주시라고 말이다. 거실 가득 퍼지는 묵향이 오늘따라 유난히 깊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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