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일기
사람은 잃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곁에 있던 것의 무게를 가늠한다. 나에게는 ‘아내의 존재’가 그랬다.
평소 공기처럼 당연하게만 여겼던 아내의 손길이 며칠간의 통원 치료로 멈추자, 우리 집이라는 견고한 성벽은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의사 선생님의 “당분간 절대 안정이 필요하니 험한 일 시키지 마세요”라는 불호령 같은 진단이 떨어진 날부터 나의 ‘이중생활’은 시작되었다.
퇴근길, 양복 차림으로 재래시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봉투 가득 담아 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의기양양했다. ‘그까짓 집안일, 며칠 못 도와주겠어?’라는 오만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현실은 냉혹했다. 부랴부랴 씻고 식사 준비를 마치고 나면 산더미 같은 설거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일이란 끝이 없는 도돌이표 같았다. 방 청소를 끝내면 세탁기가 다 돌아갔다고 비명을 질렀고, 축축한 빨래를 널고 나면 아이들의 구겨진 옷가지와 내일 입을 셔츠들이 다림질판 위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며 웃고 떠들었을 그 시간, 나는 땀방울을 흘리며 가사 노동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사건은 오늘 아침에 터졌다. 서툰 솜씨로 쌀을 씻어 보온 밥솥에 안쳤는데, 물 조절에 실패한 모양이었다. 밥솥 뚜껑을 열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밥 대신, 질척거리는 ‘떡밥’이 나를 반겼다.
아픈 아내를 위해 정성을 다했다는 내 마음과는 달리, 아내는 식탁에 앉자마자 잔소리를 쏟아냈다. 밥물이 너무 많다느니, 빨래를 널 때 털어서 널지 않아 주름이 가득하다느니 하는 소리들이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직장에서 쌓인 스트레스와 며칠간의 피로가 겹쳐 머리는 지끈거렸고, 아이들의 숙제 지도까지 도맡아야 했던 나의 인내심은 임계점에 도달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버럭 화를 내버렸다. 아픈 사람을 두고 해서는 안 될 모진 말들을 뱉어내고는 도망치듯 사무실로 출근했다.
회사에 앉아 있는 내내 마음이 납덩이를 매단 듯 무거웠다. 후회는 늘 늦게 찾아오는 법이다. 점심 무렵, 걱정스러운 마음에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것은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딸아이의 목소리였다.
“엄마는 조금 전에 병원 갔고요, 저는 지금 피아노 치고 있어요. 아빠! 퇴근하면 빨리 와서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하세요. 얼른 화해해야 해, 알았지?”
아이의 천진난만한 아양과 부탁에 나는 멍해졌다. 부모의 다툼을 지켜보며 가장 가슴 졸였을 녀석이 오히려 아빠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퇴근 후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딸아이는 두 팔을 벌려 내 목을 껴안았다. 그 작은 온기가 닿는 순간, 꾹 참았던 뜨거운 무엇인가가 눈시울을 적셨다.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집안의 질서는 엉망이 되었고 아이들의 교육은 갈 길을 잃었다. 단순히 밥을 하고 청소를 하는 기능적인 역할을 넘어, 아내는 이 가정의 평화와 온기를 유지하는 ‘태양’ 같은 존재였음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아내가 없는 거실은 시베리아 벌판보다 고독했고, 아내의 손길이 닿지 않는 부엌은 온기 없는 창고와 다를 바 없었다.
이제 나는 세상의 모든 남편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곁에 있을 때 잘하라는 그 진부한 격언이 사실은 인생 최고의 진리임을. 아내의 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숭고한 영역이며, 그 빈자리는 상상 이상으로 깊고 쓸쓸하다는 것을 말이다.
오늘 밤, 다 구워진 김처럼 바삭해진 마음으로 아내의 손을 꼭 잡아야겠다. 그리고 말해줄 것이다. “당신이 있어서 우리 집이 비로소 집다워질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