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정년퇴직 하기 전, 같은 동년배들끼리 친목 모임 하나를 만들었다. 이름은 오구회였다.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각자의 삶에서 무너질 듯한 시간을 버텨온 사람들이라는 자부심,
그 정도가 이름에 담겨 있었다. 회원은 열일곱 명. 두 달에 한 번, 우리는 얼굴을 마주하고 안부를 묻는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말수가 줄어든다지만, 그 자리에서는 늘 이야기가 넘친다.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각자의 말에는 무게가 있다.
오구회 모임의 약속은 단순하다. 애경사가 생기면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 상을 당하면 함께 가고, 멀면 마음이라도 보태며, 기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축하한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는 자연스레 가늘어지지만,
오구회 모임만큼은 그렇게 흩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자리를 지켜왔다.
어제는 그 오구회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장모님 상을 당해 부고를 받았다. 경상북도 안동의 장례식장이었다.
문자를 읽는 순간, 마음 한쪽이 조용히 꺼져 내렸다. 어제까지도 웃으며 안부를 나누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회원들에게 카톡으로 부고소식을 돌렸다.
혹시 문상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정은 다들 비슷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일정은 각자의 삶에 얽혀 있었다. 결국 조의금과 근조화환만 먼저 보내기로 했다.
장례식에 직접 가지 못한 미안함은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았다.
나이가 들수록 부고는 잦아지고, 발걸음은 점점 더뎌진다.
마음은 늘 먼저 도착해 있는데,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순간들이 늘어난다. 그것이 노년이 우리에게 조용히 내미는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소일거리 삼아 하이닉스 주식 한 주를 샀다. 큰 기대도, 큰 욕심도 없이 숫자가 오르내리는 화면을 한동안 바라봤다. 인생도 저 숫자들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중요한 것은 오름이나 내림이 아니라, 그 흐름 앞에서 너무 조급해하지 않는 태도일 것이다.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제약회사 홍보실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뜻밖에도 내가 가끔 보내던 생활수필이 독자들에게 잘 와닿는다며,
회사 사보 지면에 정식으로 게재하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계약서도 보내겠다고 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마음이 움직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날은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퇴직 이후 나는 브런치스토리에 생활수필을 써왔다. 처음부터 계획한 일은 아니었다. 하루를 살다 보면 우울한 날도 있고, 슬픈 날도 있고, 문득 이유 없이 웃음이 나는 날도 있다.
그런 감정들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워 글로 남겼다. 어느새 사백 편이 넘는 글이 쌓였다. 글을 쓰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글은 내게 있어 기록이자 숨구멍이었다.
요즘은 장소도 가리지 않는다. 휴대전화 하나면 어디서든 쓸 수 있다. 문장이 막히면 큰딸이나 작은딸에게 슬쩍 물어본다. 스피커폰을 켜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글보다 먼저 마음이 풀린다. 아이들은 가끔 말한다.
“아빠는 요즘이 제일 좋아 보여요.”
그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나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 나이에 다시 직장에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그래서 요즘은 자원봉사라도 하며 후반기를 잘 살아보려 애쓴다. 욕심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주변에서는 종종 말한다.
“참 부럽게 사신다.”
내가 나를 부러워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게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한결 따뜻해진다.
최근에 읽은 책 한 권의 문장이 오래 남았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살라는 말이었다.
미움은 물처럼 흘려보내고, 은혜는 황금처럼 가슴에 간직하라고 했다. 사람은 축복 속에서 태어났으니, 해야 할 일이 아직 많다는 문장도 덧붙여져 있었다. 괜히 인생을 조급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혔다.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진심으로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친구가 있는가.
그리고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가.
이 가운데 하나만 갖추어도 사람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중 몇 가지를 이미 가지고 있다. 가족이 있고, 오구회라는 동년배 친구들이 있고, 글을 쓰는 시간이 있다.
그러니 더 바랄 것이 있을까 싶다.
오늘은 부고도 있었고, 주식은 오르내렸으며, 뜻밖의 기쁜 소식도 함께 찾아왔다.
인생은 늘 이렇게 여러 얼굴로 하루를 건넨다. 그래서 더 진짜처럼 느껴진다.
오늘은, 그래도 즐거운 날이다.
나는 앞으로도 크게 욕심내지 않고, 마음을 다치지 않으면서, 주어진 하루를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
지금 이만하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