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만남은 헛되지 않았노라고

by 자봉

퇴직 후의 시간은 대체로 잔잔하다.

바람 없는 호수처럼 하루가 흘러가다가도, 문득 들려오는 부고 소식 하나에 마음은 거친 풍랑을 만난다.

한때 같은 공간에서 숨을 맞추며 일했고, ‘동료’라는 이름으로 허물없이 지냈던 이들. 김희상, 정웅덕, 김남일, 왕경호, 박병준. 이술현, 조화규, 정현택,

이제는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수십 명의 동료와 친구들이 이미 저세상으로 떠났다는 사실 앞에서 인생의 덧없음이 실감 난다.

그들이 떠난 빈자리는 카카오톡 명부 속 멈춰버린 대화창처럼 공허하다. 지울까 말까 망설이다가도 끝내 삭제하지 못하는 것은, 함께 땀 흘리고 소주잔을 기울이던 그 뜨거운 시간마저 사라질 것만 같아서다.


3년 만에, 혹은 5년 만에 들려오는 소식이 비록 슬픔일지라도, 인연의 끈이 아직 이어져 있다는 사실 앞에서 반가움과 먹먹함은 늘 동시에 찾아온다.

어느 퇴직 선배는 말했다. “퇴직 후 3년은 괜찮다. 하지만 5년이 지나면 인연의 절반이 줄고, 7년이 지나면 30%만 남는다.” 설마 했던 그 말은 가혹할 만큼 정확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좀처럼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나는 가끔 인생을 헛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누구를 만나든 보편적으로 내가 먼저 지갑을 열었다.


배려이자 성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만 애쓰는 것은 아닐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모임에 가도 마음이 온전히 맞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삐딱한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흐리는 이도 있었고, 이해관계에 따라 이익이 될 사람에게만 붙는 이들도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 백이전에서 ‘창승부기, 미지천리’를 말했다. 쇠파리도 천리마의 꼬리에 붙으면 천 리를 간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누군가를 디딤돌 삼아 앞서가려 애쓰며 살아간다.

속담에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난다”라고 했다. 내 삶을 스쳐 간 수많은 인연 가운데에도 향기를 남긴 이가 있었고, 비린내를 남긴 이도 있었다. 권력과 힘이 있을 때만 환호하다가 그 빛이 바래면 등을 돌리는 만남도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인생이란 결국 ‘진짜’를 걸러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70%가 떠나간 자리에 남은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이 남긴 기억은 내 삶에 깊은 향기로 남아 있다. 인연이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물과 햇빛이 필요하듯, 이제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꾸준함으로 곁의 사람들을 대하려 한다.

삶은 곧 만남이고, 만남은 관계를 만든다. 지금 내 연락처는 고요하고 모임의 활기도 예전만 못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연의 가치를 믿는다. 먼저 떠난 이들이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남겨진 시간을 조금 더 성실하게 채워가야겠다는 마음도 든다.


만남은 하늘이 준 인연이지만, 그 관계를 아름답게 이어가는 일은 결국 나의 몫이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남은 인생을 향기 나는 종이처럼 살아가고 싶다. 나의 천리마였던 인연들, 그리고 지금도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안부를 전한다.

우리의 만남은 헛되지 않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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