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밑의 시간ㆍ지상의 풍경
서울에 산 지 수십 년이지만, 나의 세상은 늘 서울 서남부의 경계 안에 머물러 있었다.
직장이 있는 영등포와 마포, 양천, 가끔 나들이를 가봐야 종로가 고작이었다.
동북쪽 끝의 돈암이나 동대문 너머는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참으로 먼 곳이었다. 정릉에서 1년 동안 자원봉사를 할 때도 그랬다. 공덕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성신여대역에서 환승해 북한산 보국문역에 내리는 동안, 나는 늘 땅 밑 어둠 속에 몸을 맡겼다.
지하철 노선도는 명확했으나 지상의 풍경은 늘 베일에 싸여 있었다.
내게 서울의 북동쪽은 40년 전 기억 속에 멈춰버린, 낡고 빛바랜 흑백 사진 같은 동네였다.
그러다 최근, 귀한 인연의 부름을 받고 4호선 여행에 몸을 실었다.
고교 동창이자 직장 동기, 시골에서 올린 나의 초라했던 결혼식에도 먼 길 마다치 않고 달려와 주었던 옛 친구가 성신여대 근처
한 아파트의 관리소장으로 있다는 소식이었다.
15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건너뛰어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며 비로소 지상으로 고개를 내민 동네의 맨얼굴을 마주했다
.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네 글자 그 자체였다.
내 머릿속 미아리는 좁은 골목길 사이로 낡은 기와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서민들이 살았던 허술한 주택가였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서남부의 여의도나 마포에 뒤지지 않는 번듯한 빌딩 숲이었다. 성신여대 입구부터 길음, 미아사거리를 잇는 길목마다 대형 백화점들이 들어서 있고, 낡은 한옥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땅 밑으로만 다닐 때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지상이 일궈낸 치열하고도 화려한 발전의 함성이었다.
친구와 마주 앉아 마시는 커피 한 잔에는 지난 세월의 에피소드가 설탕처럼 녹아 있었다. 영등포에서의 근무 시절과 철도 공사에서의 파란만장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15년의 공백은 어느덧 짧은 찰나처럼 느껴졌다.
문득, 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말씀이 떠올랐다. 인생의 가장 즐거운 황금기는 65세부터 75세까지라고.
그 말이 가슴 한구석에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무언가를 더 채우고 모으기보다는, 가볍게 비워내고 나누며 살아야 할 시기임을 깨닫는다.
재산을 쌓기보다 내 발길이 닿지 않았던 추억의 장소들을 찾아가며 '인생 후반전'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졌다.
한때 자취하며 청춘의 고단함을 달랬던 봉천동 골목과 1호선 종착지 인천역 인근. 용현동에서 40년 전에
살았던 추억들,
그리고 직장을 구해 열정을 쏟았던 잠실 종합운동장 근처까지. 이제는 지하철의 어둠 속에만 머물지 않고, 지상으로 올라와 변화된 세상과 조우하려 한다.
산이 가깝고 공기가 맑은 이 낯선 동네 지하철 4호선 근처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만큼, 이번 여정은 내게 새로운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가진 것을 줄여가며 좋은 사람들과 정겨운 대화를 나누는 삶.
40년 만에 마주한 미아리의 변신처럼, 나의 노년 또한 그렇게 아름답고 성숙한 풍경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면서 살리라 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