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두 얼굴
맹자의 성선설 vs 순자의 성악설. 이를 보고 독자들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에이, 그래도 인간은 자연에 사는 짐승들보다야 착하지.”/“인간만큼 나쁜 존재는 없지.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둬 키우는 게 아니라잖아?” 이에 대한 독자들의 생각은 평상시 본인이 가족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애정과 관심을 받고 자랐는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그로 인해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 개인적 배경 또는 환경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러한 논제는 학계에서도 뜨거운 감자다. 유전학, 뇌과학도 인간은 이기적인가? 또는 이타적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이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노력한다. 유전학에서는 인간을 한없이 이기적인 존재라고 본다. 한때 한국 사회를 열풍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이기적 유전자‘다. 필자는 아직까지 이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앞으로 읽을 예정이다.) 이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들은 바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책의 서두에서 이런 말을 꺼낸다. ”나의 목적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말을 통해 독자들은 리처드 도킨스가 왜 이 책을 집필했는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전자의 세계는 비정하고 냉정한 속임수와 경쟁, 그리고 끊임없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에 더해 이러한 이기성은 이타성을 발휘시키고 이렇게 발휘된 이타성은 인간의 이기심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일 뿐이다. 즉 도킨스는 인간의 이기심이 유전자의 전략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뇌과학의 경우 인간의 이타심은 뇌 작용의 산물이라고 본다. 뇌과학은 뇌에 복내측 전전두피질과 배내측 전전두피질이 있다고 주장한다.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을 위해 행동할 때는 복내측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되고, 타인을 위해 행동할 때는 배내측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사람의 이기심과 이타심을 과학적으로만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는 철학, 사회•과학에서도 관심이 많다. 필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의 이기심과 악함을 바라보고자 한다.
순자는 인간이 본디 악하기 때문에 통치자는 예로써 다스려야 하고 예에 부합하는 음악을 만들어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 본성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옛 성인들의 가르침인 예에 따라 악한 본성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봤다. 진나라 시절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는 인간이 악하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안 나머지 이를 형벌과 상으로써 다스리고자 했다. 실책과 잘못은 벌로써 다스리고 잘한 것은 보상으로써 달래어 국가 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해나가고자 한 것이다. 맹자의 경우 인간은 본성적으로 착하며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이 사단이라고 주장했다. 사단은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입증해 줄 수 있는 4개의 단서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있다. 하지만 간혹 악한 사람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그 사람이 가진 본성이 탁해져서 악해진 것이 아닌 그저 그 사람이 악행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단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도덕적 수행을 하며 사단을 확충해 나간다면 그는 악한 사람들도 본인이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한 본성을 싹 틔울 수 있다고 내다봤다.
서양 사상가인 니부어는 개인이 선량한 도덕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개인 간의 갈등은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집단의 이기심은 개인의 이타심보다 그 힘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결국 개인도 그러한 집단의 이기심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서 고안한 것이 집단과 집단은 권력을 위해 투쟁하기에 한 집단의 권력을 견제하려면 또 다른 집단의 권력을 빌려야 한다는 이론이다. 국제관계학파 중 고전적 현실주의에 속하는 모겐소는 이러한 성향이 국가에서도 나타난다고 보며 국제 사회도 국내 사회처럼 끊임없이 권력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똑같다고 본다. 그렇기에 국가는 동맹 전략을 통해 세력 균형을 이루며 불가피할 경우 전쟁도 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본 글에 제시된 사례들은 글의 중심 논지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수록되었으며 분량이 꽤나 많다. 관심 있는 사례나 익숙한 지역 중심으로 발췌해 읽더라도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 인류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자. 아래는 이와 관련한 글들이다.


위 제시문은 15세기 대항해 시대 즉 신항로 개척에 앞장 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대한 제시문이다. 저러한 대항해 시대 이후 서구 열강들의 해외 식민지 개척이 가속화되었으며 이는 19세기 산업화로 인한 독점 자본주의의 성장과 함께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참고로 제국주의의 상징인 포함 외교는 대항해 시대의 주역이었던 포르투갈이 최초로 실행했다.)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서구 열강들은 베를린 회담을 개최해 아프리카를 여러 군데로 쪼개 먹었고 막무가내로 국경선을 정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아프리카의 복잡한 민족•인종 구분이 더 복잡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래서 현재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경선들이 지도에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직선들이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도 아프리카가 수많은 내전을 겪게 되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아래는 19세기말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각 열강들의 식민지 목록이다.
영국: 이집트, 수단, 케냐,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이지리아, 영국령 소말리아, 인도, 미얀마(버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가이아나, 상하이 조계지, 톈진 조계지, 영국령 뉴기니, 남부 이란 등
프랑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마다가스카르, 알제리, 프랑스령 모로코, 튀니지, 모리셔스, 지부티, 콩고 공화국, 톈진 조계지, 상하이 조계지, 프랑스령 기아나 등
미국: 필리핀, 파나마 운하 지대, 상하이 조계지, 쿠바, 웨이크 섬, 존스턴 환초, 미드웨이 섬, 괌, 푸에르 토리코, 라이베리아(1821-1847)
일본: 조선, 대만, 펑후 제도, 남사할린, 쿠릴 열도, 오키나와 열도(류큐 왕국), 오가사와라 제도, 뤼순•다롄(청•일 전쟁에서 이겨 들고 왔으나 얼마 안 가 러시아의 삼국 간섭으로 러시아령이 되었다. 나중에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넘겨 받는다.)
포르투갈: 앙골라, 마카오, 고아,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브라질(1811년에 독립), 동티모르
독일: 토고, 탄자니아, 나미비아, 카메룬, 부룬디•르완다(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독일령이었으나 1차 대전에서의 패전 이후 벨기에의 식민지가 된다.), 비스마르크 제도, 마셜 제도, 독일령 뉴기니, 칭다오, 톈진 조계지
러시아: 북사할린(1925년에 일본이 남사할린에서 철수한 후 사할린 전역을 점령한다.), 북부 이란, 카자흐스탄, 키르키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핀란드, 몰도바, 폴란드, 뤼순•다롄(러•일 전쟁 이후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에게 넘겨준다.)
네덜란드: 인도네시아, 수리남
벨기에: 콩고 민주 공화국, 르완다•부룬디(1차 대전 이후 독일로부터 넘겨받는다.)
스페인(에스파냐): 스페인령 모로코, 스페인령 서사하라, 적도 기니, 카나리아 제도
이탈리아: 리비아, 이탈리아령 소말리아, 에리트레아, 톈진 조계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톈진 조계지
우리는 열강들이 식민지를 운영하면서 여러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을 잘 안다. 여기서는 그
예시들을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다.
영국에서는 인도에서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자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또한 롤럿법을 제정해 재판 없이 인도인들을 구금하기도 했으며, 식민지에서 일어난 여러 독립운동들을 탄압했다. 프랑스도 알제리의 독립운동을 가혹하게 진압했으며 2차 대전이 끝난 후 베트남을 다시 수복하려고 했던 프랑스는 1차 인도차이나 반도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세포이 항쟁의 주동자들을 대포 끝에 매달아 처형하는 모습, 흑백을 컬러로 복원한 사진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도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개척했을 당시 현지인들을 착취하며 수탈했고, 에스파냐는 한 발 더 나아가 멕시코의 아스테카 문명과 페루의 잉카 문명을 파괴했다.(아스테카 문명은 코르테스에게 멸망, 잉카 문명은 피사로에 의해 멸망) 이후 사카테카스 은광이나 포토시 은광을 개발해 막대한 양의 은을 현지 원주민들과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착취해 가며 수탈했다.
독일도 탄자니아에서 일어난 원주민의 마지마지 운동을 탄압했고 나미비아에서 일어난 헤레로족의 무장봉기를 진압했다. 미국도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고, 일본은 류큐 왕국을 합병할 때 타이완 출병을 함으로써 대만에 있는 청나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외에도 조선에서 일어난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이후에는 조선을 강제 합병해 1910년대 무단 통치를 통해 조선인들을 억압적으로 다스렸고, 1930년대 전쟁이 확대되자 징용•징발(공출)•징병•지원병 제도•국가 총동원령 등을 통해 조선으로부터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해 갔다.
네덜란드도 인도네시아에서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을 실행함으로써 수탈•착취하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을 진압한답시고 학살•체포•감금 등을 자행한다. 이탈리아의 경우 리비아의 독립을 막기 위해 식민 통치 기간 동안(1911년-1943년) 22만 5000명의 리비아인을 학살한다.
오스만 제국은 1821년부터 1829년까지 그리스가 자국으로부터 독립하려 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다. 그리고 그리스 독립운동을 진압한답시고 1822년 그리스의 히오스 섬에서 그리스인들을 대규모 학살•추방한다.(82000명이 학살당하고, 50000명이 노예가 되었으며 23000명이 히오스 섬에서 추방당한다. 그 결과 섬에 남은 그리스인들은 20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학살•추방당하거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모두 합하면 15만 5000명이다.) 이는 1825년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였던 외젠 들라크루아가 ‘히오스 학살’을 그림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아래는 그 그림이다.

또한 1894년 오스만 제국 내의 이슬람교도들이 비틀리스주에서 아르메니아인과 대규모 충돌을 벌이는데 이 사건으로 1차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벌어지며 그 결과 최소 10만에서 최대 2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망한다. 이 학살이 콘스탄티니예 거리에서 일어났기에 콘스탄티니예 학살이라고도 부른다. 2차 아르메니아인 대학살도 일어난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무장봉기를 일으켜 독립하라고 획책한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해 2차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벌인다. 그 결과 10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사망한다. 최소로 잡으면 80만 명 최대로 잡을 겨우 120만 명이라는 통계도 있다. 그러나 현재 정설은 100만 명이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관련 사진 1(땅에 있는 뼈들이 학살당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유골이다. 그리고 그 유골을 한 아르메니아인이 쓸쓸히 쳐다보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관련 사진 2
이뿐만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876년 4월 오스만 제국령 불가리아에서 독립을 위해 봉기가 일어났는데 오스만 제국은 이 봉기 진압을 위해 군대 투입 대신 비정규 민병대 투입을 결정한다. 이 민병대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했기에 모든 장비를 사비로 마련했다. 그리고 이러한 민병대는 불가리아 바타크 마을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다. 이러한 학살을 오스만 제국은 그저 방관•방치한다. 그 결과 적게는 1200명 많게는 8000명이 사망했으며 현재는 주로 5000명가량이 죽었다고 집계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제국 시절 남하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체르케스 전쟁을 하는 동안 체르케스인 대학살을 벌이는데 여기서 사망하거나 추방당한 체르케스 인들만 해도 100만에서 150만 명이나 된다. 표트르 1세 시절 극동 개척을 할 때도 시베리아에서 원주민에 대한 크고 작은 학살과 노동 착취가 빈번히 일어났다. 또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난 후 소련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홀로도모르(소련의 행정 실패로 인해 일어난 인위적 가뭄)를 방치해 우크라이나에서 250만에서 300만 명이 사망하도록 했고,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 동부에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본토의 러시아인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그 결과로 인해 현재까지도 드니프로강을 기준으로 동부에 러시아계 인구가 많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후 정치적 갈등을 빚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고(친서방vs친러) 결국 돈바스 전쟁이 터지고 이 전쟁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확전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차 대전 당시 소련 점령 하 폴란드에서는 소련이 카틴 숲의 대학살을 통해 포로로 잡힌 폴란드 군장병들을 학살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때는 헝가리에서 소련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헝가리 혁명이 발발하나 이를 붉은 군대를 투입해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또한 소련이 독-소 전쟁에서 반격하는 과정에서 나치의 학살에 보복한답시고 독일인들을 상대로 학살•강간 등을 자행한다. 1937년에는 극동 지방에 사는 고려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데 10만여 명은 카자흐스탄으로 7만여 명은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진다. 이들이 여기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소련의 무관심과 방치로 최소 16,000여 명에서 최대 50,000여 명의 고려인들이 사망한다. 이외에도 나고르노카라바흐 때문에 일어난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전쟁, 조지아내 친러분리주의 세력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때문에 일어난 조지아-러시아 전쟁,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 우지아를 비롯한 몰도바 내 친러분리주의 세력, 핀란드가 오랫동안 러시아의 침공에 시달린 것(겨울 전쟁, 계속 전쟁, 핀란드 전쟁), 발트 3국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의 친서방화 등 이 모든 것들이 러시아(소련)식 제국주의의 여파로 인해 일어난 것이다. 이외에도 러시아는 2차 리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 2차 이라크 내전에도 개입했으며 아프리카(부르키나 파소, 말리, 알제리, 짐바브웨, 모잠비크,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마다가스카르, 적도 기니, 카메룬, 수단, 에리트레아)에서도 와그너 용병 그룹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 중인 데다 와그너 용병 그룹은 막대한 채굴권을 챙겨 이득을 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위에서 언급했던 필리핀에서의 민간인 학살 외에도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했던 민간인 학살이 있으며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애꿎은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함으로써 민간인을 희생시켰고, CIA를 통해 남미에 친미 성향 군부 독재 정권이 수립되도록 획책해 군부 정권이 자행하던 정치 테러(구금, 체포, 고문, 학살 등)를 묵인•방관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칠레 쿠데타 개입, 니카라과 내정 개입, 과테말라 쿠데타 획책 등이 그 대표적 예시다. 또한 명분이 없었던 2차 이라크 침공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미군들이 민간인을 죽이기도 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동안에도 미군들이 민간인을 죽였다. 1차 아프가니스탄 내전, 1차 이라크 내전, 1•2차 리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 등에도 개입하며 무장 게릴라 세력들을 지원하나 이들이 학살을 자행할 때 미국은 비판만 할 뿐 그들의 학살을 저지하기 위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냉전 시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무자헤딘을 지원해 주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무자헤딘에서 알카에다가 떨어져 나왔다. 결국 알카에다를 키운 것도 미국이었던 것이다. 또한 니카라과의 콘트라를 CIA가 지원하면서 콘트라가 가지고 있던 마약 처리까지 담당하는데 이게 중남미와 미국 전역에 마약이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약 연결선이었던 파나마까지 침공했으나 마약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고 이는 중남미에서 카르텔이 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게다가 쿠르드족 노동자당(PKK)을 지원하다가 나토 회원국인데다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 잡은 튀르키예 때문에 미국은 쿠르드족 노동자당(PKK)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그 결과 미국이라는 뒷배를 잃은 쿠르드족에 대해 튀르키예는 가혹한 보복을 할 수 있게 된다.(왜냐하면 쿠르드족은 튀르키예와 시리아 내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으로써 독립하기 위해 튀르키예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위에서 언급한 학살 외에도 민간인 학살을 언급한다면 홀로코스트가 제일 유명한데 다들 알다시피 600만 명의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학살했고, 이외에도 독-소 전쟁을 치르면서 슬라브족을 종족 청소하다시피 했다. 또한 유대인들을 상대로 인체 실험까지 자행했다. 일본도 위에서 언급한 학살 외에 난징 대학살(30만 명 사망), 동남아 등지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과 전쟁 범죄를 여럿 자행했으며(바탄 행진이 대표적 예시다.), 아시아 전역에 걸쳐 위안부를 만들어 여성을 징발해 대규모 성폭행•간강 등을 체계적으로 자행했고(인도네시아에 남아있었던 300여 명의 네덜란드 여성들이 위안부에 강제로 끌려가 성폭행•강간을 당했다. 이를 스마랑 강간 사건 혹은 백마 사건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백마는 동양 남성들이 서양 여성을 성희롱하거나 성적인 대상으로써 폄하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점령지에서 강제 수탈•징병•징용도 많이 했다. 731 마루타 부대를 통해 인체 실험까지 자행했다.

나치 포로수용소 해방 직후 사진 1

나치 포로수용소 해방 직후 사진 2

나치 학살 현장

위안부 사진 1

위안부 사진 2

죽음의 바탄 행진 관련 사진 1

죽음의 바탄 행진 관련 사진 2
세르비아도 인종 청소로 유명한데 특히나 유고슬라비아 내전(1991~1999)에서 일어난 학살이 유명하다. 이 내전 안에 여러 전쟁이 있었는데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등이 있다. 이 중 보스니아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이 유독 많이 일어났다. 세르비아 정규군이 보스니아인들을 종족 청소(제노사이드) 한답시고 대량 학살한 것이었다. 대표적 예시로 스레브레니차 학살이 있는데 여기서 민간인 8,372명이 사망한다.

보스니아 학살 현장 관련 사진
네덜란드로부터 식민 지배를 당한 인도네시아의 경우 독립한 지 9일 만에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 동티모르를 강제 합병한다. 그리고 1975년부터 2002년까지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인도네시아는 27년에 걸쳐 동티모르의 독립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당시 80만 명의 동티모르 인구 중 20만 명을 죽인다. 당대 동티모르 인구의 약 25%가 사망한 것이다. 그중 유명한 사건이 산타크루즈 대학살이다.
1991년 10월 27일 무고한 동티모르 청년이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청년의 시신은 산타크루즈 묘비에 안치된다. 11월 12일 장례식 2주 후 청년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관습을 지키기 위해 수천 명의 주민들이 독립을 외치며 산타크루즈 묘지에 모였다. 인도네시아군은 비무장한 시위대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그 결과 273명이 사망하고, 250명이 실종, 370여 명이 부상당한다. 이 사건이 바로 앞서 언급한 산타크루즈 대학살인 것이다. 하지만 동티모르의 독립은 이 사건으로부터 11년 뒤인 2002년에야 성사된다.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학살당한 동티모르인들
이뿐만 아니다. 중세나 근세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있다. 1차 십자군 원정 때 십자군이 예루살렘 수복에 성공해 거기서 이슬람교도들을 대거 학살했다. 4차 십자군 원정 때는 십자군이 동맹이었던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거기 있는 민간인들을 죽인 걸로 유명하며 또한 몽골은 호라즘 왕국, 키이우 루스,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함락시킬 때 대규모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이외에도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일본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1차 원정을 할 당시 이키섬 전투에서 승리 후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는데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거나 여성들의 손 한가운데에 구멍을 내어 밧줄로 연결하고 그 밧줄을 배에 연결시켜 여성들을 산채로 익사시키기도 했다. 또한 산속으로 도망간 민간인들을 추격하는 몽골군이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와 죽일까 봐 아기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죽이는 참사도 벌어진다.

4차 십자군 원정 중 동맹인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는 십자군들

키이우 루스를 공격하는 몽골 제국 군대

호라즘 왕국의 어느 한 요새에 진입하는 몽골 제국 군대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몽골 제국 군대(바그다드 공방전)
중국이 전국 시대였을 때는 장평대전에서 진나라가 조나라의 지휘관이었던 조괄을 죽이고 45만 명을 포로로 잡는데 이들을 모두 생매장시켰다. 그나마 15세에서 16세인 청소년은 풀어줬다고 하는데 이는 고작 240명에 불과했다. 또한 청나라의 경우 명나라를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양주성에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데 당시 양주성의 인구가 20만에서 30만이었고 청나라는 16만에서 24만 명을 죽였다. 즉 양주성 전체 인구의 80%를 죽인 것이다. 이를 양주십일이라고도 부른다. 이뿐인가? 청나라는 건륭제 때 티베트•신강(장)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준가르족 학살도 자행했으며 번부를 통해 간접 지배함으로써 이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했고, 이러한 기조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온다.

양주십일 학살 관련 그림

장평에서 발견된 유골(장평대전 때 포로로 잡혀서 학살당한 조나라 사람들의 유골)

무장한 중국 공안과 신장(강) 위구르 자치구 주민이 대치하는 모습

네팔 주재 중국 대사관 주변에서 중국 정부에 항의하는 티베트 인권 운동가들을 네팔 경찰들이 연행하는 모습
이렇듯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제국은 결국 권력에 대한욕망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 위에 세워졌다. 또한 제국주의는 결코 서구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으며, 피지배국 역시 제국을 추구했던 역사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가해자냐 피해자냐’가 아니라, 권력을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 그리고 이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인간의 잔혹성과 이기심이다. 이를 깨달을 때, 우리는 역사를 도구화하거나 감정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
이외에도 16세기 때 유럽에서는 로마 카톨릭에 불만을 가지고 개신교 세력이 떨어져 나오는데 영국 국교회, 루터파 개신교, 칼뱅파 개신교(필자의 종교이기도 하다.)가 대표적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루터파 개신교 제후들을 탄압하자 루터파 개신교 제후들이 종교의 자유를 빌미로 카를 5세에게 대항한다. 그 결과 신성로마제국에서 슈말칼덴 전쟁(1530년-1547년)이 발발한다. 전쟁 이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가 체결되는데 여기서 루터파 개신교가 제국의 종교로써 공인된다.(1555년) 하지만 이 또한 얼마 안 가 페르디난트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제국을 카톨릭화하려고 하자 결국 30년 전쟁이 발발한다.(1618년-1648년)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수없이 학살당하며 독일은 전체 인구의 1/3을 잃는다. 이 전쟁의 결과로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어 칼뱅파와 루터파가 전부 인정된다.

프랑스 화가 자크 칼로가 그린 <전쟁의 엄청난 비극> 30년 전쟁 중 사망자의 시신을 나무에 매다는 중이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루터파 개신교를 믿는 위그노 세력과 기존의 로마 카톨릭을 믿는 세력 사이에서 위그노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 있었다. 로마 카톨릭 세력이 프랑스 파리에서 위그노들을 대량 학살한 것이다.

프랑수아 뒤부아가 그린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의 한 장면
하다 못해 한국도 민간인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적 있다.
고구려의 경우 약탈과 침략이 대무신왕(고구려 제3대 왕)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부여, 옥저, 동예, 낙랑, 대방 등 주변 국가에 자주 쳐들어가 약탈을 일삼았다. 또한 105년에는 요동반도를 공격하면서 약탈했다. 이에 더해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가 만주에서 팽창할 때 숙신, 말갈 등 여러 북방 민족들을 공격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395년 비려(패려)를 정복함으로써 3개의 부락과 6~700개의 영을 휩쓸고 이후 전리품으로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양•소 등을 얻은 사실이다. 발해의 경우 무왕 때 장문휴 장군이 당 나라 산둥 반도의 등주를 공격하면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등주는 이러한 약탈로 인해 꽤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당나라 허맹용이 지은 <오승체 묘지명>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발해가 위쪽으로 마도산에 이르자 관리와 백성들이 달아나고 흩어지며 생업을 잃었다.“
고종 치하 대한 제국의 대한제국군 5000명은 서양식 무기와 화포, 기관총으로 무장해 북간도를 침략한다. 그 결과 청나라군 15,000명을 전멸시킨다.(1901년~1904년) 이 과정에서 청나라 민가를 약탈하고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는 청나라 측 기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조선(대한 제국)이 함부로 요동 경계로 침입하여 우리(청나라) 군인과 민간인을 사살하고, 병영에 불을 지르고 농토를 불사르고 가축을 빼앗는 등 만행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이를 제지하지 않으면 만주가 한순간에 조선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즉시 4개 영을 추가로 파견해 대응할 것을 촉구합니다."
<만주 봉천부의 청 중앙 정부 지원 촉구문>
"한국 병사가 무리를 이끌고 도문강을 건너와 우리 군대(청나라)를 공격하고 우리 백성의 점포를 불태웠다. 또한 강 너머에 참호를 파고서는 우리 병사가 왕래하면 총을 쏘며 공격해왔다."
- 1903년 9월 청나라 측 기록 -
그리고 이외에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국군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이다. 1968년 2월 12일 청룡 부대가 퐁니-퐁넛 마을을 지나면서 마을 주민 74명을 학살한 사건인데 이 중 4명은 1살도 채 되지 않은 갓난아기들이었다…
또한 한국 전쟁 직전 제주 4•3 사건, 여순 10•19 사건, 한국 전쟁 중의 보도연맹학살사건 등이 있다. 이 사건 전부 이승만 휘하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다.(이승만이 직접 죽이라고 지시했는지는 아직까지도 논란이다.)
북한군의 경우 한국 전쟁 초기 서울을 점령했을 당시 서울의대 부속병원에 있는 부상병과 환자 1000여 명가량을 학살했다. 또한 전쟁이 한창이던 때 303 고지에서 북한군이 미군 41명을 죽이는 사건도 일어났다.(303 고지 학살)

보도연맹 학살 사건 관련 사진

제주 4•3 사건 당시 민간인 학살 현장을
재현한 사진

여순 10•19 사건 당시 국군이 반란군의 정보 요원으로 활동했던 3명의 여성들을 체포한 사진

303 고지 학살 사건 관련 사진

서울의대 부속병원 학살 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추모비
이러한 학살은 현대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방패막이로 삼는다든지 또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했을 때 이스라엘 출신 일가족을 학살했다든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했다든지(이르핀 학살, 부차 학살, 이지움 학살) 등

부차 학살 관련 사진

이지움에서 발견된 집단 매장지

이스라엘 군인들이 이스라엘 남부에서 하마스에 의해 사살된 이스라엘 민간인 시체를 수습 중인 사진

이스라엘의 보복 폭격 때문에 다친 소녀를 한 남성이 가자 지구 시파 병원으로 급하게 옮기는 모습
독자들은 세상에서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생물이 누구일 것 같은가?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1위는 모기다. 물론 모기가 무기를 들고 직접 죽인 게 아닌 지카 바이러스, 말라리아, 에볼라 등 질병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2위는 무엇일까? 그렇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 생물이다. 인간. 아래는 이와 관련한 통계 자료다.

모기는 바이러스를 통해 한 해 평균 72만 5000명을 죽인다. 그리고 인간이 전쟁과 폭력을 통해 한 해 평균 47만 5000명을 죽인다. 사실 위에서 본 사례들을 감안해 본다면 별 놀랄만한 통계는 아니다. 이쯤 되면 인간이 그리 썩 좋은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본성적으로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을 우리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 아래의 글을 보자.

윗글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인상 깊은 문장이 나온다. “누구는 상대를 업신여기고 불량하고 악독하면서도 육신이 멀쩡하게 지내고 누구는 온순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착하면서도 복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가. 이 때문에 형벌로 징계하고 상으로 권장하여 죄와 공을 기리는 것으로 바로 잡았으니 이것이 또한 정(올바름)이다.“
여기서 필자는 ’형벌로 징계하고‘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와 유사한 주장을 했던 사람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했던 한비자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기에 죄는 형벌로 다스려야 하며 공은 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는 진시황 치하 진나라의 통치 체제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또한 베카리아는 사형이 가지는 공포감으로 인해 비롯되는 인상은 강렬하지만 인간이 지니는 망각의 힘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며 지속적으로 공포감을 심겨줄 수 있는 형벌이 범죄 억제력이 있다고 보고 사형제 대신 종신노력형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 범죄자가 짐승같이 취급받고 평생 노동만 하는 모습을 일반 시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지속적인 공포감을 심겨줘야 범죄의 재발을 예방할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런 논리들은 얼핏 보면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과연 이게 다일까? 한비자의 법가 사상은 지나친 형벌을 강조함으로써 진승•오광의 난으로 진나라가 멸망하는 계기를 제공했고, 베카리아의 저러한 논리는 현재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구형해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살인이나 범죄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는 측면에서 효력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앞서 언급했던 한비자의 사례처럼 과도한 공포감 조성을 통해 국정 운영을 해나가는 것이 한계가 있다는 점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추가적인 사례들이 더 있다.
아시리아의 경우 기원전에 최초로 서남아시아(중동)를 통일했는데 피지배 민족에 대해 가혹한 탄압과 억압을 자행하자 결국 피지배 민족이 일으킨 무장봉기에 의해 멸망한다.
프랑스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파의 국민 공회가 자행한 공포 정치도 대표적 예시다. 그는 자코뱅파에 대항하는 세력을 반혁명 세력으로 규정하고 혁명 재판소에서 마녀 사냥하듯 재판을 한 후 단두대에서 사형시키는 방식의 공포 정치를 자행했다. 당시 단두대 주변은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뭐만 하면 사형이니….) 이로 인해 국민 공회 당시 단두대에서 처형된 사람만 해도 루이 16세, 마리아 앙투아네트 등을 포함해 1만 명이 넘는다. 결국 과도한 공포 정치로 인해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고 총재 정부가 수립되면서 로베스피에르 주도 하의 국민 공회와 공포 정치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1910년 경술국치가 시작된 이후 일제가 무단 통치를 하면서 식민지 조선에 대한 공포 분위기를 형성해 억압한다. 9년 뒤인 1919년 이러한 일본의 통치에 불만을 느낀 조선인들은 3•1 만세 운동을 통해 독립을 시도한다. 일본은 이를 무력으로 진입하긴 했지만 단순히 공포감을 조성해 찍어 누르는 것만으로는 조선을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 1920년대부터 좀 더 온건한 문화 통치를 실시한다.(물론 진짜로 온건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말이다.)
1937년 니카라과에서 소모사 가르시아가 정권을 잡은 뒤 수 십 년 동안 소모사 가문의 3대 독재가 실시된다. 이 기간 동안 소모사 독재 정권은 반정부 시위를 탄압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성향의 지식인들을 체포•감금했으며 언론을 통제하는 등 공포감 조성을 통해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결국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43년 동안 진행된 소모사 가문의 긴 독재와 억압은 종지부를 찍는다.
이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승만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1960년 4월까지 12년 동안 장기 집권하나 결국 4•19 혁명으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는 1979년까지 18년을 집권하나 10•26 사태로 인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그의 독재는 끝이 났다. 같은 해 전두환이 12•12 군사 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하고 1980년 체육관 선거에서 대통령이 된 후 7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을 노태우에게 넘겨주고 본인은 뒷선으로 물러난다.
이란 또한 이슬람 근본주의로 회귀한 후 히잡 착용 의무화를 강제한 나머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히잡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이는 반정부 시위로 확대되었다. 이란의 전임 대통령인 라이시가 강경 진압하자 시위는 더욱 확대되었다. 라이시가 헬기 추락 사고로 급사한 후에 치른 조기 대선에서 중도 우파 성향의 페제쉬키안이 당선되었는데 이 또한 기존 라이시 정권의 강압적 통치로 인한 불만으로부터 초래된 결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 벨라루스, 헝가리, 튀르키예 등 권위주의 국가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이유도 이와 유사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미에서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자 1808년 나폴레옹의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인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혼란한 틈을 타 오이긴스, 시몬 볼리바르, 산 마르틴이 남미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스페인•포르투갈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 2차 대전 직후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약소국들도 앞서 언급한 열강들의 가혹한 수탈과 식민 지배 때문에 독립운동을 통해 독립함으로써 서구 제국주의가 막을 내린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이 사태들이 말해주는 공통적인 사실이 하나 있다. 인간을 힘과 권력으로만 통치해서는 안 된 다는 것이다. 즉 너무 과도하게 공포 분위기와 억압적 분위기를 조성하면 언젠가는 이에 대한 조직적 반발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사회•과학 연구가 하나 있다.
윗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재니스는 공포 소구의 수준을 높음, 중간, 낮음 3가지로 설정해 실험을 한 결과 공포 소구의 수준이 중간일 때가 가장 높은 설득 효과를 보인다는 결론을 내놨다.
레밴달은 이러한 결론이 인간의 감정적 반응에만 집중한 결과라고 비판하며 인지적 반응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위험 통제 반응을 인지적 반응으로 간주하고 공포 통제 반응을 감정적 반응으로 간주해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인지적 반응 즉 위험 통제 반응이 발현되면 공포 소구 효과가 생기는 반면 감정적 반응 즉 공포 통제 반응이 발현되면 공포 소구 효과가 떨어진다고 결론지었다.
위티는 공포 소구 효과를 결정하는데 있어 위협과 효능감을 중시했다. 효능감은 공포 소구에 담긴 권고를 이행하면 자신의 위험을 예방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 내지 그러한 권고를 실행할 능력이 있다고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위협은 공포 소구에 담긴 위험을 자신이 경험할 수 있고 그 위험의 정도를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위티는 위협과 효능감 전부 높을 경우 위험 통제 반응(인지적 반응)이 작동해 공포 소구의 효과가 증가하고, 위협이 높지만 효능감이 낮으면 공포 통제 반응(감정적 반응)이 작동해 공포 소구 효과가 떨어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한 둘 다 낮으면 공포 소구의 효과가 아예 없어진다고 봤다.
이를 위에서 언급한 여러 사례들에도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지나치게 강압적으로 또는 억압적으로 통치하거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 위협의 수준은 올라가지만 효능감의 수준이 떨어지게 되고 그 결과 공포 통제 반응(감정적 반응)이 작동해 공포 소구 효과가 감소함으로써 체제에 덜 순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추후 조직적인 반발의 바탕이 된다. 다시 말해 무력을 통해 공포감을 유발하면 그러한 공포감으로 인해 일정한 정도까지는 피지배 계층이 체제에 순응하겠지만 너무 과해지면 오히려 체제에 순응하는 것에 의문 내지 불만을 품고 반란•봉기•시위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독재 정권이나 권위주의 정권이 몰락하며 제국이 붕괴한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제국은 피로써 세워지고 피로써 무너진다고 볼 수 있겠다….)
그래서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독재•권위주의 정권이나 제국주의 열강들이 일정 부분의 자유를 제공해주기도 하며 독재 정권이 경제 성장을 본인들의 성과로 내세우며 독재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전두환의 3S 산업(Sports, Sex, Screen -> 스포츠 산업, 포르노 산업, 영화 산업을 의미한다)과 야간 통행금지 해제, 청소년의 두발•복장 자율화, 박정희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경부 고속도로 개통 등이 대표적 예시다. 또한 영국이 1935년 인도통치개선법을 제정해 군사와 외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자치권을 인정해 준 것, 일본이 3•1 운동 이후 1920년대에 문화 통치를 실시한 것도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시진핑, 푸틴, 루카셴코, 빅토르 오르반 등 독재자나 장기 집권자들이 국민들에게 정치•언론•집회의 자유를 제외한 일정 부분의 자유를 허용해 주는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러한 이유로 북한의 김정은, 이란의 하메네이(대통령은 페제쉬키안이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최고 종교 지도자인 하메네이다.),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튀르키예의 에르도안까지 권위주의적 집권자들 또는 독재자들의 통치 능력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의 통치 능력을 통해 억압과 자유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잘 유지해야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본인들의 권력을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를 얼마나 잘 인식하고 수행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국제 정세도 크게 요동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