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수준에 따른 교육 격차로 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한계와 시사점
• 주의 본 글은 사회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긍정적 뉘앙스보다는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글의 전반적 분위기가 부정적이며 읽는 내도록 찝찝하거나 불편할 수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순응하며 살아갈까? 과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좋은 것일까? 현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중시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격차와 불평등이 생긴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단점을 보완해 준다. 하지만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 한다. 일례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신분 상승이 가능하나 완전히 유동적이지 않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사례가 부모의 소득 수준에 따라 자식의 교육 수준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자식의 미래 소득 수준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대다수의 사회•과학 연구에서 밝혀졌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도 천장과 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현대 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전근대적 요인이 잔재해 있음에도 이 체제에 순응하며 사는 것일까? 답은 위에서 언급한 유동성에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모두가 알다시피 신분 간 유동성이 없다. 태어나면 태어나는 대로 산다. 부모가 귀족이면 자식도 귀족이다. 부모가 농노면 자식도 농노다. 부모가 노예면 자식도 노예다. 부모가 왕족이면 자식도 왕족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받는 대우도 달라진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어떨까? 물론 위의 사회•과학 실험처럼 부모의 직업이 자식의 미래 직업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이고, 부모의 현 소득이 자식들의 미래 소득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태어나는 대로만 살라는 법은 없다. 그래도 노력을 하면 어느 정도의 신분 상승은 기대해 볼 수 있다. 비록 하늘에 있는 별 따기, 사막에서 바늘 찾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그나마 자유를 보장하는 이념이다. 이건 그 누가 뭐라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헌법에 이러한 권리가 명시되어 있으며 이를 보장하기 위해 입법부와 사법부가 존재한다. 이러한 법의 보호 속에 우리는 우리만의 다양성과 자유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고, 경쟁을 통해 물질적 풍요로움과 발전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단점이 존재한다. 정치적 양극화 이로 인한 여론 분열과 사회 통합 저해, 투표로 인한 소수 의견의 배제, 경쟁의 심화와 상대적 박탈감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다른 이념들보다 좋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먼저 사회주의를 살펴보자.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인해 초래된 불평등 때문에 탄생했다. 하지만 현대 국가들 중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해 성공한 국가가 있는가? 없다. 소련조차도 결국 막대한 재정난과 러시아인들의 민주화 요구에 못 이겨 무너졌다. 그리고 소련 내에서도 여전히 불평등은 존재했었다. 스탈린과 같은 일부 집권층들은 부유했으나 인민들은 그렇지 못했으며, 그들은 그 집권층들을 위해 희생되었다. 정치적 자유? 없었다. 인권과 권리? 찾아보기 힘들었다. 소련이 만약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성공한 사회주의 국가였다면 지금의 중국과 베트남도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체주의는 어떤가? 이것도 문제가 많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켰지만 결국 그 결과는 국가의 파멸이었다. 여성들은 전통적 역할을 강요당했고(출산과 양육, 집안 살림 등),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여성들처럼 본인들의 인생을 살아가기 힘들었다. 이는 SS 친위대(슈츠스타펠)의 수장 하인리히 힘러가 라벤스보른이라는 정책을 실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정책을 통해 나치는 순수 게르만족 혈통으로 판명된 독일 여성들과 SS 장교들 간의 혼외 관계나 임신을 장려했고 이로 인해 게르만족 혈통의 아이들을 낳도록 유도해 출산율을 증대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은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양상은 무솔리니의 발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남성은 군인이 되어 국가에 피를 바치고, 여성은 어머니가 되어 자식을 바쳐야 한다“(1927년 연설 중)
“여성은 ‘출산의 기계’로서 존재한다.”(1930년대 연설 중)
”여성은 부엌에 있어야 하며,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1920년대 라디오 연설 중)
무정부주의(아나키즘)는 어떤가? 우리에게 정부가 없다면 사회계약론자들 특히 홉스가 말했던 자연 상태(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홉스는 이러한 자연 상태 속에서 인간이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리 즉 무제한적 자연권 행사가 불가피하다고 보았고 바로 이 때문에 자연 상태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고 일컬었다.)로 되돌아가야 한다. 치안과 질서가 무너지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한다. 정부가 없어진 초반에는 우리 몸에 깊숙이 벤 준법 태도 때문에라도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지는 않겠지만 언제까지나 우리의 그러한 태도에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자비심은 한계가 분명하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면 뭐든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만큼은 자비심이 설 자리가 없다. 우리의 생활상은 마치 영화에서 본 디스토피아 또는 아포칼립스가 될 게 분명하다.
전제군주정. 이것을 타파하기 위해 수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시민들이 시민 혁명을 함으로써 희생했다. 우리는 이것을 진보라고 불렀다. 우리가 저러한 체제로 돌아간다는 것은 진보하는 것이 아닌 퇴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는 것과 똑같다. 이럴 경우 우리는 합리적 존재가 아닌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존재다. 애써 무너뜨렸던 부정의한 체제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니 말이다. 이것만큼 비효율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대체할 이념을 만든다 할지라도 현재 우리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부터 누리는 이득을 능가할 수 있냐는 불확실성이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 인간은 수 없이 많은 정치 체제와 경제 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실패했고, 성공적이지 못 했다. 저런 불투명한 상황에서 가까스로 도출한 결과가 바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다.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물어보자. 현재 여러분들이 민주주의&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이 들기는 하지만 가끔 가질 수 있는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예를 들자면 치킨 먹으며 넷플릭스 시청하기, 여름-겨울 휴가철마다 캠핑을 가고, 국내외로 여행을 가며 호텔에 머무는 것 등 이외에도 현대 사회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을 포기할 자신이 있는가? 웬만한 사람들은 자신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 고안한 경제 체제와 정치 체제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저러한 것들을 그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애초, 이제 더 이상 어떤 정치 체제와 경제 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요소 그리고 자본주의적 요소를 혼합한 형태의 정치-경제 체제다. 그러니 기존의 사상을 혼합-재활용한 것이지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참고로 현재는 이런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도 과도한 복지로 인한 재정 부담 증대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의 여파, 난민 문제로 인한 극우의 약진과 보수 반동으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즉, 우리는 이미 현대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누리고 있고 누려왔기에 또 너무나도 깊이 이 체제에 적응했기에 벗어날 수도 없다. 애초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그의 저서 ‘자유의 종언‘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이데올로기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앞서 필자가 주장한 바에 근거한다면 타당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의 과학적•사회학적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의 뇌는 뇌과학적으로 특정 행동을 할 경우 주어지는 보상에 중독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포르노를 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포르노를 보다 보면 그것이 주는 자극과 쾌감으로 인해 흥분하여 도파민이 분출되면서 뇌가 그 도파민을 일종의 보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계속해서 포르노물을 찾는다. 이는 포르노물뿐만 아니라 다른 활동도 마찬가지다. 만약 우리가 특정한 활동 예를 들자면 운동하기, 넷플릭스 시청, 일하고 난 후 월급을 받고 휴가철에 놀러 가는 것 등을 반복적으로 하게 된다면 우리의 뇌는 이러한 시스템에 적응해 결국 고생하는 것도 참는다. 이 고생 끝에 주어질 보상이 있다는 것을 반복적인 활동을 통해 뇌가 습득했기 때문이다. 이는 체제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생하며 반복적으로 일을 하고 그 대가로 휴가를 가거나 월급을 받는다면 뇌는 당연히 여기에 적응하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도 여러 가지 불합리함을 목격•경험함에도 불구하고 인내•적응한다.
둘째, 인간은 모방력이 뛰어나다. 결국 이 모방력도 인간이 적응하기 위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고 한 것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혹자는 고대 사상가가 말한 게 무슨 신빙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틀렸다. 사실 가장 신빙성이 있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는 점에서 출발해 국가 자연 발생설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가를 가장 최고의 덕 즉 행복을 실현할 수 있는 최상의 공동체라고 내다봤다 이제 이 주장을 사회학•심리학적으로 증명해 보자.
먼저 흥미로운 사회학 실험이 하나 있다. 영유아와 침팬지 새끼를 데려다 놓고 여러 기믹이 달린 투명 상자 안에 사탕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한 연구자가 영유아와 침팬지 새끼 앞에서 사탕을 꺼내 먹을 수 있도록 거쳐야 하는 단계들을 보여줬다. 영유아와 새끼 침팬지는 이를 곧잘 따라 했다. 하지만 몇 번의 반복 끝에 침팬지 새끼는 이 단계들 중 사탕을 꺼내 먹는데 불필요한 단계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 단계를 생략하고 사탕을 꺼내 먹었지만 영유아는 그걸 알고 있음에도 앞의 한 연구자가 따라 하는 단계별을 수칙들을 그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따라 했다. 이는 인간이 모방력이 뛰어나고 그것이 인간의 생존성을 높여줬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이제 엘리자베스 노엘 노이만의 침묵의 나선 이론을 보자. 이 이론은 잡단 지성의 영향을 보여준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공동체에서 소외당하는 걸 가장 무섭게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학에서는 인간이 군집을 이루고 소속감을 느끼며 관계를 맺는 것은 모두 상호 이익과 생존 때문이라고 본다. 이를 ’관계 이익론‘이라고 본다. 이는 침팬지와 같은 다른 포유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침팬지는 사냥할 때 무리 지어 사냥한다. 왜 그럴까? 이는 각 개개인의 사냥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지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시 본론을 돌아와서 침묵의 나선 이론은 이러한 인간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인간은 군집에서 멀어지는 것을 생존의 차원에서 꺼려하며 소외당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감이 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어떤 사회 내에서 다수의 견해가 있으면 아무리 자신의 견해가 맞다 하더라도 그 견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거나 혹은 그 견해를 묵살하고 다수의 견해에 편승한다는 것이 엘리자베스 노엘 노이만의 침묵의 나선 이론의 핵심이다.
앞서 언급한 모든 사례들은 결국 인간이 집단적 본능과 사회적•정치적 본능이 있는 존재이며 주어진 환경과 집단을 모방하며 이에 적응하는 존재임을 증명해 준다.
이걸 현대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에 적용시켜 보자. 어떤가? 이제 왜 우리가 현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치명적인 단점을 직접 목도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침묵하며 수동적인 존재로 살아가는지 답이 오는가? 인간은 결국 생존을 우선하며 그 과정에서 법과 제도, 문화와 도덕으로 이타심을 발현시켜 그 이기심을 일부 극복할 수는 있지만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이 타고난 기본적인 욕구와 생존 본능 그에 기인한 모방력과 사회적•정치적 성향 그리고 이기심은 결국 오래전 인류가 이 땅에 발을 딛었을 때부터 유전에 각인되어 온 유전학적인 현상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유전적•심리적•뇌과학적•사회학적 한계 때문에 사회주의를 통해 평등한 이상을 실현하는 것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주의의 모순과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보고서도 침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왜 우리가 단점이 있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순응하며 사는지 알겠는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 중 그나마 나은 결과다. 인간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고, 부딪히며 만들어 낸 산물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다. 다른 체제보다는 부작용이 덜하며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걸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라도 존재한다.(시민 불복종, 국회 청원 등) 어렵다 할지라도 다른 정치 체제보다 상대적으로 신분 상승할 기회가 조금 더 주어진다. 이러한 이유들로 우리는 문제가 많다고 하면서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지구상에 현존하는 다수의 국가들이 이 체제를 수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