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
이번에는 러시아가 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한 번 알아보자. 러시아가 이 전쟁을 일으킨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지리적/안보적 이유, 두 번째 경제적인 이유, 세 번째 정치적인 이유, 네 번째 패권적인 이유다.
러시아와 나토의 세력 범위를 한 번 살펴보자. 나토 문양이 그려져 있는 국가나 지역은 나토 세력이고, 회색으로 칠해져 있는 국가는 나토나 러시아 둘 중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이며, 러시아 국기가 그려져 있는 국가나 지역은 러시아의 세력 범위이고, 파란색으로 빗금이 칠해져 있는 국가는 나토 회원국은 아니지만 가입을 희망하거나 또는 나토와 협력하는 국가임을 의미한다.
러시아와 동유럽 사이에는 동유럽 평원이 존재한다. 아래는 관련 사진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동유럽 평원이 달갑지가 않다. 왜냐하면 외세가 쳐들어올 경우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적의 공격을 방어해 줄 자연적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표적 예로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사적 압박 등이 있겠다. 그래서 러시아가 고안한 것이 바로 공격으로서의 방어다. 이 개념은 이반 뇌제(=이반 4세)가 처음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공격으로서의 방어는 러시아의 오랜 대외 정책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러시아 제국 때는 바르샤바 왕국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동유럽 평원에서 외세가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국경을 수도인 모스크바에서부터 멀리 떨어뜨려 놓았으며, 소련 시절에는 바르샤바 조약기구(=WTO)에 동유럽 국가를 가입시켜 철의 장막을 형성해 국경을 수도 모스크바로부터 멀리했다.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같은 맥락이다. 동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동유럽 대평원이 있기 때문에 나토가 동진하면 러시아에게 안보적 위협이 된다는 취지다. 그래서 러시아는 루카셴코를 통해 벨라루스를 러시아의 괴뢰국으로 만들고, 이번에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러시아 제국과 소련 때처럼 국경과 수도 모스크바 사이에 완충 지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제적인 이유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5번째로 큰 곡창 지대다. 어느 정도냐 하면 전쟁 이전 우크라이나의 연간 곡물 생산량은 6000만~7000만 톤이었는데 이 중 90% 즉 5400만 톤~6300만 톤이 우크라이나에서 수출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점령한 돈바스에는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4차 산업혁명에 있어 필수적인 리튬이 있으며, 2차 산업에 있어 필수적인 석탄과 철광석도 풍부하며 우주항공사업에 필수적인 티타늄 또한 풍부하다. 캐나다 싱크탱크인 세크데브에 의하면 러시아가 압수한 매장량의 가치는 12조 4000억 달러다. 러시아는 이러한 우크라이나를 군사 행위를 통해 위협함으로써 러시아 중심의 경제 연합체인 유라시아경제연합(=EEU)에 편입시킬 계획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러시아는 EU를 견제하고 이와 동시에 국제 경제에 영향을 끼치며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지하자원을 매개로 하여 국제 공급망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이었다. 한마디로 미국과 EU처럼 경제 패권을 쥘 궁리를 하고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세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다. 푸틴은 본인이 정치적으로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전쟁을 하나의 돌파구로 사용해 왔다. 제일 대표적인 것이 2차 체첸 전쟁이다. 그는 1999년 8월 러시아 남부 캅카스 지역의 체첸 자치 공화국을 침공해 2000년 2월 굴복시켰다. 그 해 치른 대선에서 푸틴은 53%의 득표율로 첫 대선에서 당선됐다. 그리고 2008년 총리로 물러앉아 있었을 당시 나토 가입을 시사했던 조지아에 군사 행위를 감행하며 삽시간 안에 조지아를 제압함으로써 서방에 맞선 강한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러시아 대중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 인기를 바탕으로 역대 최고 지지율(88%)을 기록한다.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유로마이단 시위(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러시아-친서방 시위)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크름 반도를 강제 합병함으로써 푸틴에 대한 지지율은 80%대로 올라간다 전쟁 발발 1년 전인 2021년에는 40% 이상이 푸틴이 2024년 3월 대선에서 재당선되는 것에 반대했고, 2021년 11월 푸틴에 대한 지지율은 63%에 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2024년 3월에 있었던 대선에 대비하기 위해 푸틴은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 발발 직후인 2022년 2월에는 지지율이 71%, 3월에는 83%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2024년 3월에 있었던 대선 때는 다시 한번 이러한 법칙을 증명하듯 87%의 득표율로 5차 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인기는 현재까지도 지속 중이다.
네 번째는 패권적인 이유다. 푸틴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한 명 있는데 바로 알렉산드르 두긴이다. 이 사람은 정치적으로 유라시아주의를 표방하며 유라시아 국가들이 러시아를 중심으로 미국을 위시한 서방을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푸틴은 그의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았다. 이는 푸틴의 대외적인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체첸의 독립을 막기 위해 1,2차 체첸 전쟁을 일으켰고(1차는 1994-1996, 2차는 1999-2009), 2007년에는 뮌헨 연설로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를 비판했으며, 2008년에는 조지아 전쟁, 2014년에는 크림 반도 합병과 돈바스 전쟁 개입, 와그너 그룹을 통한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확대(리비아 내전, 수단 내전 개입 등), 시리아 내전 개입, 미래에 잠재적인 경제적 가치가 있는 북극 항로를 두고 미국과 충돌하는 것, 이번의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등…. 전통적으로 사이가 안 좋았던(냉전 시대 중-소 국경 분쟁과 1860년 베이징 조약을 통해 제2차 아편전쟁 중재 대가로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를 떼어간 것 때문 등등) 중국과 현재 손을 잡는 것도 미국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 러시아의 1차적 목표는 우크라이나 남부 점령지와 몰도바 내에 있는 친러시아 분리 지역인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군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미콜라이우 주로의 진격이 막히자 러시아는 1차적 목표를 수정했고 그 결과 러시아 본토와 돈바스 그리고 크림 반도를 잇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만약 러시아의 1차적 목표가 달성됐더라면 몰도바가 위험에 빠졌을 것이다. 몰도바는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처럼 나토 회원국이 아닌 데다 친러 분리주의 세력을 영토 내에 가지고 있다. (가가우지아와 트란스니스트리아) 만약 러시아가 미콜라이우 주를 점령하는 데 성공해 트란스니스트리아까지 육로를 연결하는데 성공했더라면 러시아가 몰도바까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지아처럼 무력으로 굴복시켜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지아를 합병하거나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까운 몰도바의 수도 키시너우를 점령해 현재 몰도바의 친서방 정권인 마이아 산두 정부를 붕괴시키고, 친러 정권을 수립하는 등)
또한 유출된 기밀 문건에 따르면 2030년까지 푸틴은 벨라루스를 러시아 연방에 병합할 계획이다. 이렇듯 국제 사회에서 러시아는 본인의 몸집을 불려 중국과 손을 잡고 미국에 대항해 미국의 단극 체제를 무너뜨려 본인의 입맛에 맞게 국제 질서를 재편하거나 또는 미국의 패권을 빼앗아 올 계획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푸틴은 러시아를 다시 한번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을 계획이었다. 이러한 큰 그림으로 푸틴은 이번에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왜 그렇게 국운을 걸어가면서까지 러시아와 싸우는 것일까?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우크라이나는 가망 없는 싸움을 포기하고, 러시아에게 넘어가면 되는데도 말이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역사 속에 답이 있다.
우크라이나에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상징하는 인물인 보흐단 흐멜니츠키라는 인물이 있다. 흐멜니츠키는 당시 그의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폴란드의 봉건 귀족인 차플린스키가 이 영지를 습격해 흐멜니츠키의 약혼녀를 빼앗고, 그의 아들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1647년) 그러자 흐멜니츠키는 자신의 카자크 세력과 원래는 앙숙이었던 크림 타타르인을 포섭해 연합군을 조직하여(약 9000명)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킨다. 이를 흐멜니츠키 봉기라고 부른다. (1648년) 여기서 흐멜니츠키는 폴란드군 6000여 명을 격파해 승리한다. 이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여태까지 겪어왔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한 탄압 때문에 이러한 흐멜니츠키의 행보를 적극 지지하며 흐멜니츠키는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 영웅이 된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흐멜니츠키는 세력을 불려 가며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게 된다. 이 병력을 바탕으로 여세를 몰아 폴란드군 8만 명을 격파하여 당시 폴란드의 수도였던 바르샤바를 포위한다. (1648년~1657년까지 현재 우크라이나에 존재했던 국가를 헤트만국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견제하기 위해 흐멜니츠키는 자신을 도와줄 세력을 찾다가 러시아의 전신이라 할 수 있으면서도 같은 동방 정교회를 믿는 루스 차르국과 페레야슬라프 조약을 체결한다. 하지만 흐멜니츠키의 예상과는 달리 이 조약으로 인해 헤트만국의 정치적 자율성이 일부 제한되면서 루스 차르국에게 예속된다. 1667년에는 헤트만국을 배제시키고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해 드니프로강을 기준으로 헤트만국의 서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동쪽은 루스 차르국이 점령한다. 이 결과 헤트만국의 영토는 축소되고, 세력은 약화되었다.
이후 루스 차르국이 표트르 대제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성장해 러시아 제국으로 바뀐다. 그리고 표트르 대제는 절대 군주로써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했던 것처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국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표트르 대제 치하의 러시아 제국이 발트해에 대한 제해권을 놓고 스웨덴 제국을 상대로 북방 전쟁을 치른다.(1700-1721) 표트르 대제의 헤트만국에 대한 강압적인 정책에 불만을 품고 위기감을 느낀 헤트만국의 카자크는 스웨덴 제국과 연합해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 싸운다. (1709년/스웨덴-카자크 3만 연합군 VS 표트르 대제 4만 대군) 하지만 결과적으로 북방 전쟁에서 스웨덴 제국이 패배함으로써 헤트만국은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후 예카테리나 여제는 행정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헤트만국의 영토를 소러시아와 키이우(=러시아어로는 키예프) 총독부로 분할하면서 아예 러시아의 속령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러시아 제국은 전쟁 중인 1917년 자국 내에서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연이어 발생하고 10월 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가 정국을 주도하며 1918년에 독일 제2 제국(=독일 제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한 뒤 협상국 측에서 이탈한다. 이 조약의 결과로 러시아에 속해있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독립한다. 얼마 안 가 오-헝 제국에 속해있던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도 독립한다. 하지만 러시아에 속해 있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경우 독립한지 얼마 안 되어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수복하겠다던 레닌 휘하의 소비에트 정부가 침공을 감행한다. 신생 독립국이었던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모아 크루티에서 소련군의 공세에 맞선다. (1918/크루티 전투) 그 결과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 그러다가 1919년에 서우크라이나 공화국이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에 자발적으로 편입되면서 하나의 통일된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탄생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대한 소련의 지속적인 물량 공세와 우크라이나 통일 직후 1919-1921년 동안 진행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결과로 리가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서부 우크라이나는 서부 벨라루스와 함께 폴란드에게 넘어가고, 동부 우크라이나는 동부 벨라루스와 함께 1922년 소련에게 넘어가면서 우크라이나는 다시 한번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이후 시간이 지나 소련 치하에 있던 우크라이나는 위기를 맞게 된다. 1932년-1933년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닥쳐오면서 농수산물 생산량이 급감한 것이다. 이 시기 소련은 스탈린 치하에 있었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산업 발전을 국가 주도로 이끌어가고 있었는데 농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농장을 개인이 경영하는데 익숙한 우크라이나에서는 소련의 이런 농업 집단화 정책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우크라이나에서의 농수산물 생산량이 얼마 안 되자 소련의 중앙 정부는 이에 대한 책임을 우크라이나 농민들에게 모두 전가시키고, 이들의 농장을 습격해 식용 또는 종자용을 포함한 모든 곡물들을 수탈해 갔다. 결국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홀로도모르/우크라이나어로 아사를 의미한다.)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소련 중앙 정부의 후속 조치는 더욱 경악할만하다. 대기근이 심해지자 우크라이나인들은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으려고 했으나 소련 정부는 국내 여권을 도입해 이들이 우크라이나를 떠나는 것을 막았다. 이중, 삼중 억압에 항의하는 우크라이나인에게는 소련 비밀경찰의 체포, 고문, 처형 등이 뒤따랐다. 홀로도모르를 연구하는 현대 역사학자들 가운데 다수도 이 사건의 상당 부분이 당시 막 싹트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억누르려는 스탈린의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억눌러 우크라이나가 계속해서 소련 지배 하에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소련의 정책이 지금까지도 우크라이나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이다. 바로 돈바스 지역에 러시아 인구가 많아진 것인데 이로 인해 우리는 돈바스가 애초부터 친러 지역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홀로도모르로 인해 돈바스 지역에 있는 우크라이나인 인구가 감소해 노동 가능한 인구가 없어지니 소련의 중앙 정부에서 대규모 이주 정책을 통해 본토의 러시아인들을 돈바스 지역으로 이주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돈바스 내 러시아인 인구는 급증했고 이는 2014년 루한스크와 도네츠크의 독립 선언으로 이어지면서 돈바스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서구의 제국주의 정책이 현재 아프리카에 많은 후유증을 남긴 것처럼 소련식 제국주의 정책이 우크라이나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이후 1941년 독-소 전쟁이 시작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저러한 홀로도모르 때문에 나치를 반겼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일부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은 나치의 학살에 동조하기도 한다. 이를 주도했던 인물이 스테판 반데라다. 이 인물은 우크라이나에서도 독립 운동가냐 아니면 나치에 동조한 학살자냐라는 의문 사이에서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이 인물을 빌미로 우크라이나 전체를 나치 세력이라고 주장하며 우크라이나를 탈나치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이번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국내외의 친러 세력들도 이러한 사실을 왜곡해 우크라이나는 나치 색채가 강한 국가이며 러시아가 옳은 일을 하고 있고, 우크라이나가 침략당해도 할 말이 없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주장이다. 애초 우크라이나 전체가 나치 세력이라고 단정 짓는 것부터 말이 안 되며 스테판 반데라와 그에 동조한 일부 극단주의 세력들이 나치의 학살에 동조한 것이지 우크라이나인 전부가 나치의 학살에 동조한 적은 없다. 이후 나치가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별관심이 없던 것을 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들은 오히려 나치에게 협조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나치랑 손잡았다고 해서 친나치 국가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핀란드가 나치와 손잡은 사실을 안다. 그렇다고 해서 핀란드 보고 친나치라며 비난하지 않는다. 크로아티아에서도 나치에 부역하는 정권인 우스타샤 정권이 있었다. 이 정권은 크로아티아에서 집시, 유대인 등을 포함해 35만 명을 학살한다. 스웨덴도 나치가 노르웨이를 점령하는데 있어 나치와 군사 정보를 공유했고, 나치의 스웨덴 내 철도 이용을 허용해 핀란드로 향하는 무기 공급을 묵인해줬으며 독일군이 스웨덴 내 철도를 이용해 전선으로 이동하는 것마저 방관했다. 또한 철과 석탄 등 전략 물자를 공급해 주는 대가로 중립국 지위를 인정받는 등 나치의 침공에 동조했다.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도 독-소 전쟁에서 의용군 형식으로 병력을 파병해 도움을 준다. 프랑스에서도 비시를 근거지로 하며 페텡 원수를 중심으로 한 비시 정부가 수립되면서 나치와 협력한다. 하지만 우리는 현재 이러한 국가들이 전부 나치의 후손이며 척결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가? 아니다. 근데 왜 유독 우크라이나에만 저런 식으로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왜 우리는 저러한 러시아의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가? 만약 나치 세력이 문제라면 현재 서유럽과 하다 못해 러시아 내부에 퍼져있는 네오나치도 문제가 되며 전쟁의 명분이 될 수 있다. 푸틴의 논리대로라면 러시아는 유럽 곳곳에 퍼져있는 네오나치 때문에라도 유럽과 전면전을 해야 한다. 독자들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를 내세우는 푸틴의 주장은 그저 이 전쟁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명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독-소 전쟁에서 나치가 패배하자 결국 우크라이나는 독립과 또 한 번 멀어지게 된다. 이후 나치에 동조했다는 명목으로 소련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지속한다. 하지만 1980년대 냉전이 완화되는 데탕트 시대가 도래하고, 고르바초프가 동유럽 일대에 불간섭 선언을 하면서 독일 통일을 시작으로 동유럽은 소련의 지배하에서 벗어난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우크라이나는 독립한다. 그리고 1994년 우크라이나가 핵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주권과 영토 보존을 약속받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양해각서를 통한 정치적 합의 수준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확실한 안보 보장을 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초점을 둔 미국이 그 이상으로 나아가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그래서 안전 보장 양해각서로 제한된 것이다.(이때 합의된 양해각서가 바로 흔히 알려진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양해각서다.) 이후 핵까지 포기했지만 돌아온 건 아래에서 서술할 2014년 크림 반도 강제 합병과 돈바스 전쟁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었다.
이후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대선이 있었는데 이 대선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라는 친러 성향 후보와 빅토르 유셴코라는 인물이 대선 후보로 나온다. 대선 결과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당선됐다. 하지만 빅토르 유셴코의 지지자들을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중에는 선거 과정에서 부정선거가 있었음을 밝히며 이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를 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오렌지 혁명이다. 이 결과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중재로 다시 한번 대선을 치른다. 여기에서 친러 성향인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지 못하고, 상대적으로 온건적 친서방주의인 빅토르 유셴코가 당선된다. 하지만 여기서 당시 빅토르 유셴코의 러닝 메이트였던 율리야 티모셴코와 빅토르 유셴코 사이에서 정치적 대립이 발생한다. 빅토르 유셴코에 비해 급진적 친서방주의였던 율리야 티모셴코는 적극적인 친서방적 대외 정책을 선호했고 이에 비해 빅토르 유셴코는 우크라이나 내 친러 유권자들의 여론을 의식하여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친서방적 정책을 선호했다. 심지어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 일어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해(2008년) 유럽에도 금융 위기가 도래했다. 우크라이나는 이 금융위기의 여파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IMF에 구제 요청을 하지만 IMF가 제시한 구조 조정을 효과적으로 달성하지 못한다. 이렇듯 거듭된 경제 불황과 정국 불안정으로 인해 2010년 대선에서는 친러 성향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하지만 야누코비치는 전임 정부가 진행해 왔던 나토 가입을 철회했고, 2010년 4월 흑해에 주둔 중이던 러시아 해군의 철수를 취소, 철수 시한을 2017년에서 2042년까지로 연장시켰다. 이러한 그의 일방적인 정치 행보와 더불어 그와 그 측근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는 또 한 번 시위가 터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로마이단 혁명이다. 이 시위를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무장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진압 과정에서 사상자가 속출하니 시위자들도 무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시위는 유혈 사태로 흘러간다. 결국 끝까지 버틸 것 같았던 야누코비치 정권은 붕괴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명분으로 2014년에 크림 반도를 강제로 합병한다. (친러 정권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실각해서 그에 대한 보복으로 크림 반도를 강제 합병한 것이다.) 그러면서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이 크림 반도는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본인들의 땅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로마제국, 몽골제국, 오스만 제국 등 크림 반도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어 왔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수 없이 많은 전쟁을 치른 끝에{그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이 크림 전쟁(1853-1856)이다.} 러시아 제국은 크림 반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크림 반도의 원래 주인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맞다. 뿐만 아니라 냉전이 한창이던 1954년 소련의 서기장 흐루쇼프는 행정 구역 개편을 위해 크림 반도를 당시 소련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우크라이나에게 이양한다. 이후 우크라이나는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크림 반도를 자국 영토로 가지고 있었고, 1991년 소련에서 떨어져 나가 독립할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1994년에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안전 보장을 위해 체결된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양해각서에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와 국경을 보존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서명국에는 러시아도 포함되어 있다. 아무리 양해각서가 법적 구속력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양해각서와 같은 신사협정은 당사국들 간의 신의에 기초하는 것이고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강제 합병함으로써 양해각서를 위반했기에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행위는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이후 홀로도모르와 소련의 이주 정책의 후유증으로 초래된 산물인 친러 성향의 지역 돈바스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이에 개입한다. 8년간의 격전 끝에 양 측 모두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고, 결국 이는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확전된다.
여기까지가 우크라이나의 대략적인 역사다. 키이우(=키예프) 루스의 역사까지 다룬다면 내용이 너무 길어지기에 이는 제외시키고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만 다뤘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확실한 것은 우크라이나가 왜 저렇게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저항을 하는가에 대한 이유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와 EU에 가입하길 희망하며 이를 위해 전쟁까지 불사한다는 사실은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역사에 비춰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한국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