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과 자가당착 속에 무너지는 러시아의 명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있어 전쟁에 대한 책임을 서방에게 넘기는 견해가 있다. 존 미어샤이머 교수의 견해가 바로 대표적 예시다. 현재 한국 국제 관계학계에서도 이러한 그의 견해에 힘입어 이런 주장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이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가진 학자 혹은 연구원이라는 타이틀과 현실주의 국제 정치 이론으로 가장한 극단적 냉소주의를 정면에 내세우며 교묘하게 중립인 척 회색 지대식 논리로 러시아의 침공이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행위였다고 포장한다.) 여기에 더해 노태우 정권의 북방 외교와 그로 인한 불곰 사업, 북핵 이슈에 대한 러시아와의 협력 필요 그리고 전쟁 장기화로 인한 피로도 급증 때문에 한국은 특이하게도 친미 국가이지만 친러 여론이 강한 편이다.
앞서 언급한 존 미어샤이머는 서방 즉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를 자극했고 러시아는 자신한테 불합리한 국제 정세를 선제적 군사 행위를 통해 바꾸려고 했으며 그 결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됐다는 논리다. 이렇기에 러시아는 국익과 안보를 위해 군사적 행위를 취한 것일 뿐이지 실질적인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 잘못은 서방과 미국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게 전부 옳은 사실일까?
일단 이 사실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나토가 러시아에게 동진을 안 하겠다고 약속했는지의 여부를 봐야 한다. 이는 독일이 통일된 해(199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2월 독일 통일을 위한 최종 합의(이른바 2+4 조약)가 체결되는 과정에서 당시 미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고르바초프에게 "우리가 나토 일원인 독일에 미군을 배치하더라도 나토 관할권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라고 발언을 했다. 이러한 발언은 미 백악관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같은 해 5월 제임스 베이커는 고르바초프에게 “소련군이 동독에서 철수하는 동안 나토군은 그 지역으로 진출하지 않겠다."라고 말을 바꿨다. 고르바초프는 이 말을 믿었다. 어찌 됐건 당시 체결하려던 조약은 독일 통일에 관한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 했던 구두 약속이 2+4 조약에 반영이 되었는가? 답은 아니다. 2+4 조약에는 두 번째에 했던 구두 약속인 '나토군의 동독 지역 활동을 허용한다'라고만 명시되었다 결국 나토 동진 금지 또는 제약은 문서로써 합의가 된 적이 없다. 푸틴이 주장하는 나토 동진 명분은 결코 문서화된 적 없는 구두 합의에 기초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토는 과연 러시아의 주장처럼 동쪽으로 확장할 근거가 아예 없을까? 나토와 러시아 사이에서 체결된 또 다른 조약을 살펴보자. 바로 1997년에 체결된 '나토-러시아 상호관계 및 협력, 안보에 관한 기본협정'이다. 이 조약의 핵심 내용은 나토의 동유럽으로의 세력 확대를 러시아가 용인하는 대신 나토-러시아 상설공동위(PJC)를 창설해 안보 문제에 긴밀히 협력한다는 것이다. 이 협정에 근거한다면 나토는 동유럽으로 세력 확대를 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도 이 협정이 체결된지 2년 후인 1999년에는 헝가리, 폴란드, 체코가 나토에 가입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나토가 동진할 근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앞서 언급한 2+4 조약에는 나토의 동진이 불가하다는 조항도 없고 오히려 1997년에 맺어진 ‘나토-러시아 상호관계 및 협력, 안보에 관한 기본협정‘에 의하면 나토가 동진할 수 있는 법적 근거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 바로 구두 약속의 법적 구속력이다. 앞서 언급한 ‘2+4 조약’이나 ’나토-러시아 상호관계 및 협력, 안보에 관한 기본협정’은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따라 법적 구속력이 있다. 여기서 법적 구속력이 있다는 말은 이를 어길 시 법적인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구두 합의는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 협약에 따라 신사협정에 속한다. 신사협정은 법적 구속력을 가지지 않으며 그저 당사자들의 신의에만 의존하는 약속이다. 그렇기에 구두 약속을 어길 시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가능하나 법적 책임이 없다. 또한 의무 이행을 강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구두 약속이 정부수반•각료 또는 대사에 의해 맺어질 경우 외관상 조약과 구별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위에서 언급한 제임스 베이커의 "우리가 나토 일원인 독일에 미군을 배치하더라도 나토 관할권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라는 구두 약속은 어떨까? 이럴 경우 보통 아래의 4가지를 따져본다.
첫째, 당사자의 의도(intention)를 따져본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이후 제임스 베이커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저 발언은 잠시 운을 뗀 정도였는데 푸틴이 협상 과정에서 나온 얘기를 근거로 삼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반박했다. 이에 비춰볼 때 저 구두 약속은 단순히 정치적 성격의 것으로 의도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당시 맺어진 2+4 조약에 나토가 동진하지 않겠다는 문구가 표시되어 있지 않기에 그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없다.
둘째, 구체성을 따져본다. "우리가 나토 일원인 독일에 미군을 배치하더라도 나토 관할권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라는 문장만 가지고는 이를 어떻게 이행할 것인지, 이행하지 않을 경우 어떤 불이익이 생기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구체적인 권리•의무를 규정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구체성이 떨어진다.
셋째, 강제적인 국제사법절차에 의한 분쟁해결규정 포함 여부, 발효를 위한 국내절차규정 포함 여부, 유엔에의 등록 여부 등도 조약인지 신사협정인지를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하지만 위 제임스 베이커의 발언은 위 사항들에 해당된다고 보기 어렵다.
넷째, 내용의 중요도를 따져 본다. 안보, 민간항공, 관세, 무역, 인권, 특권•면제, 범죄인 인도 등 중요한 문제를 다룰 때 신사협정이 조약의 범주에 포함된다. 위 구두 약속은 안보와 관련되어 있기에 내용에 있어서 중요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저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마지막 네 번째에 해당한다고 해서 제임스 베이커의 발언이 조약처럼 법적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저 모든 사항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베이커의 저러한 발언은 조약과 같이 법적 구속력이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법적 구속력이 없는 신사협정에 포함되는 구두 약속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미국이 나토를 동진시킨다 하더라도 위법행위가 아님을 뜻한다. 이 경우 러시아는 원한다면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군사 행위가 포함되지 않는다.
설령 위의 4가지 요건들을 다 따져보았을 때 베이커의 저 발언이 신사협정의 일부가 아닌 조약처럼 효력이 있다 하더라도 다시 말해 법적 구속력이 있다고 판단되더라도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 이유를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먼저 동부 그린란드 사건에 대한 상설국제법원(PCIJ)의 판례를 살펴보자. 동부 그린란드 사건이란 1933년 노르웨이가 일방적으로 동부 그린란드를 자신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려는 칙령을 발표하자 덴마크가 이에 반발하며 생긴 사건이다. 결국 양국은 상설국제법원(PCIJ)에 이 사건을 넘겼다. 재판 과정에서 1919년 노르웨이의 외무장관이 그린란드에 대한 덴마크의 영유권을 인정한 구두 합의가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결과적으로 덴마크가 그린란드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이 판례 이후로 구두 합의도 법적 구속력이 있다고 인정받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이 판례대로 제임스 베이커의 구두 합의가 신사협정과 달리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경우 미국이 나토를 동진시킴으로써 러시아와 맺은 구속력 있는 약속을 어긴 것이 되기에 미국이 위법 행위를 한 것이다. 이 경우 러시아는 복구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복구 조치에는 군사적 조치도 포함되어 왔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점이 하나 있다. 복구에 해당하는 군사적 행위인 평시봉쇄(해군을 통해 상대국의 항구를 봉쇄하여 타국과의 교류를 단절시키는 행위)와 영토 점령은 현재 국제사회에서 정당한 행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대 국제법상 분쟁 해결을 위한 무력행사나 전쟁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푸틴이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하고 싶었다면 복구 행위 중 전쟁이 아닌 조약 파기(정지) 또는 경제적 조치(상대국 정부의 자산 동결, 수출입 금지 등)를 단행했어야 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나토 동진 금지 구두 약속을 명분으로 일으킨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구두 약속의 효력 여부가 어떻든 간에 정당성을 잃는 반면 서방의 경제 제재는 러시아의 위법행위(전쟁 행위)에 대한 합당한 조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임스 베이커가 "우리가 나토 일원인 독일에 미군을 배치하더라도 나토 관할권은 동쪽으로 1인치도 확장하지 않겠다"에서 "소련군이 동독에서 철수하는 동안 나토군은 그 지역으로 진출하지 않겠다."라고 말을 바꿨을 때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이의 제기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이에 대해 별도의 의문을 가지지 않고 그게 그거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이렇기에 이미 한참 지난 구두 약속을 이제 와서 명분 삼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푸틴의 의도는 그 속이 뻔하다고 볼 수 있다.
나토 동진으로 인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과연 단순히 서방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전적으로 서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존 미어샤이머 교수의 견해가 옳다고 볼 수 있을까? 푸틴의 명분이 이 모든 희생과 인명 피해, 이로 인해 초래된 국제 질서의 불안정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적어도 위에서 언급된 내용을 토대로 할 경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다.'가 될 것이다.
추가적으로 또 한 가지의 반박이 더 있을 수 있다. 바로 미국은 러시아처럼 타국을 침공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흔히 제시하는 사례가 미국의 제2차 이라크 전쟁이다. 맞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도 스스로 국제법을 위반함으로써 자기모순을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전쟁의 결과로 중동에서 반미 감정이 확대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미국이 이렇게 했다고 해서 러시아가 전쟁을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러시아는 줄곧 미국이 2차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것을 구실로 미국을 외교적으로 비난해 왔다. 미국도 그랬으면서 왜 러시아는 그러면 안 되냐는 식의 논리인 것이다. 여기서 모순적인 것은 러시아는 본인 스스로를 반제국주의의 선봉자이자 미국의 횡포로부터 맞서는 국가임을 자처해 왔다 그러면서 다자주의를 주창하며, 미국의 자기모순적 행동을 비난해 왔다. 과연 러시아는 모순적인 측면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러시아는 위에서 언급했듯 미국과 마찬가지로 국제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조지아와 전쟁을 했고,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했으며 돈바스 내전에 개입까지 했다. 시리아 내전에서는 무차별 공습을 통해 많은 민간인을 희생시켰고, 바그너 용병 그룹을 통해 리비아 내전, 수단 내전에 개입해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걸로도 모자라 우크라이나와 전면전까지 벌이고 있다. 러시아는 현재 미국이 하고 있는 자기모순적인 행동을 비난하면서 자국 스스로를 선의의 행위자로써 포장하면서도 미국의 모순적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 또한 자기모순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혹자는 미국도 똑같이 스스로를 포장하면서 왜 러시아는 그러면 안 되는가라고 되물을 수 있다. 여기서 필자는 똑같은 논리(러시아는 그렇게 하면서 왜 미국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인가?)로 또 반박할 수 있다. 결국 이 논쟁은 철학에서 주장하는 무한소급의 원리로 귀결된다. 따라서 이러한 논쟁은 소모적이면서도 러시아 스스로가 논점을 흐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시도하는 여론전에 불과한 것이다. 러시아가 진정으로 미국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 혹은 정당성을 보장받고 싶다면 다자주의를 표방하고 평화를 위하는 척 행위하면서 미국이 하고 있는 자기모순적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할 게 아니라 미국과는 반대되는 행보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러시아는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푸틴은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이러한 사태가 지속되는 한 러시아도 결코 미국의 모순적 행동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마지막으로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위 내용들을 바탕으로 볼 때 푸틴이 주장하는 나토 동진 반대 구두 약속은 국제법상 법적 구속력이 사실상 없는 것으로 판단되며, 이를 명분으로 한 우크라이나 침공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러시아는 미국의 이중잣대를 비판하며 자국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하지만, 정작 스스로도 제국주의적 확장과 국제법 위반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논리는 모순과 위선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전쟁의 책임을 전적으로 서방에 전가하는 미어샤이머식 논리에는 논리적·법적·도덕적 정당성이 모두 결여되어 있으며, 이는 ‘공격적 현실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를 가장한 극단적 냉소주의일 뿐이다. 진정한 현실주의란 단순히 힘의 논리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가치 외교와 국제법 체제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바탕으로 각국의 패권적 욕망과 그로 인한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접근이다. 만약 그런 최소한의 질서가 없고, 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없다면 국제사회는 홉스가 말한 자연상태보다 더 위험한 혼돈 속으로 빠졌을 것이며, 결국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재현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