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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May 21. 2021

그대여, 나를 버리고서 편히 잠들지 못할지어다.

잠들면 죽음에 이르는 병, 운디네의 저주.

운디네(독일어로 Undine, 영어로는 Ondine)란 이름은 들어보신 분이 많을 겁니다.


특히, 마법이 나오는 RPG나, 판타지 소설을 많이 접해보신 분들은 정령을 소환하는 대목에서 한 번쯤은 등장하는 단골 손님으로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운디네는 바로 '물의 정령'의 이름이거든요. 여러 작품 속에서 보통 물로 만들어진 반투명하고 푸르스름한 형태의 여성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운디네는 특정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정령은 아니고, 1500년 대에 활동했던 의사이자 연금술사인 파라켈수스(Paracelsus)가 만들어낸 존재입니다. 파라켈수스는 본명이 '필리푸스 아우레올루스 테오플라스투스 봄바스투스 폰 호엔하임(Philippus Aureolus Theophrastus Bombastus von Hohenheim)'으로, 이름 마지막 부분의 '폰 호엔하임(=반 호엔하임)'이란 부분을 들었을 때 오히려 낯익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반 호엔하임이란 이름을 지닌 인물이 '강철의 연금술사'라고 하는 유명한 만화의 주요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했으니까요.

파라켈수스(좌)와 애니매이션 속 반 호엔하임(우)

파라켈수스는 외과 의사로서도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연금술에도 조예가 깊어 '현자의 돌(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마법사의 돌)'을 만들었다고도 전해지며 현대에는 반쯤 마법사 컨셉으로 이런 저런 판타지 작품 속에서 그 이름과 이미지가 차용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 시대에 가장 과학적인 학문들이라 볼 수 있는 연금술과 의학을 동시에 연구하다 보니 마법사처럼 보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Alle Ding' sind Gift, und nichts ohn' Gift; allein die Dosis macht, daß ein Ding kein Gift ist (모든 것은 독이며 독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량만이 독이 없는 것을 정한다.)." 라는 이야기를 남기기도 했는데, 현대의 의학과 약햑 모두에서 중요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실제 약을 개발하기 위한 임상시험을 할 때에, 수많은 시험 관계자들은 독성이 가장 적고 효과는 최대화 되는 용량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다시 운디네 이야기로 돌아와서, 파라켈수스는 흙/불/물/공기의 4대 원소설을 가지고 4대 정령의 개념을 확립하게 됩니다. 그 때 물의 정령은 라틴어인 Unda(물결)에서 따와서 운디네로, 그 외에 불의 정령은 샐래맨더/흙의 정령은 노움/공기의 정령은 실프라는 식으로 명명하게 됩니다. 다 한 번씩은 들어보신 적 있는 이름일 겁니다.


파라켈수스는 독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운디네의 컨셉 자체는 독일과 동유럽 계열의 요정들의 이야기를 따와서 만든 것으로 생각되며, 동유럽(슬라브족 전설)에서 사람을 꾀어내어 물에 빠뜨려 죽이는 요정으로 알려져 있는 '루살카(Rusalka)'와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루살카는 드보르작의 오페라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내용은 역시나 물의 요정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동화 인어공주 이야기와도 약간 비슷한 면이 있으니, 한 번 찾아보시면 흥미로울 겁니다.

오페라 '루살카' 속의 한 장면.


운디네는 전설 상, 연애 전선이 험난한 경우가 많아서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헤어지게 되거나 배신 당하는 비극적 내용이 전해집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그 남자에게 저주를 내리거나, 그녀의 친구들이 복수한다는 결말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속 저주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이 자신을 버리고 바람난 남자에게 내리는 "잠에 들게 되면 숨을 쉬지 않는" 저주였습니다. 하루에 1/4~1/3은 잠을 자야하는 인간에게는 가혹한 형벌이며, 한 마디로 그냥 자다가 숨이 막혀 죽으라는 이야기였죠.


이것이 바로 '운디네의 저주(Ondine's curse)'이며 '중추성 과소환기 증후군(Central hypoventilation syndrome, CHS)'라는 질환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왜냐? 이 병에 걸린 사람들 역시, 저 전설 속 이야기처럼 잠에 드는 순간 호흡을 제대로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신경계 질환은 호흡 중추가 있는 뇌간(Brainstem)에 손상을 입거나(출혈, 종양, 염증, 경색, 독성 물질이나 부상 등의 원인으로) 퇴행성 뇌질환이 생긴 경우(파킨슨병이나 다발성 경화증 등)에 나타날 수 있으며, 혹은 PHOX2B 유전자의 이상에 의해 선천성으로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질환은 잠잘 때 호흡곤란에 의한 청색증(Cyanosis)가 발생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으며, 수면다원검사(Polysomnography)에서 깊은 수면 시기에 과소호흡을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치료를 위해 기도절개술(Tracheostomy)을 받고 인공호흡기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장기간 인공호흡기 사용으로 인한 폐렴 등이 발생할 위험성은 있지만, 이러한 의학 기술의 발달은 환자들을 '운디네의 저주'로부터 구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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