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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May 22. 2021

먹방의 시대에 읽는 그리스 신화

폭식의 저주를 받은 에리식톤

현재는 바야흐로 먹방의 시대입니다.


맛있게, 많이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스타 유투버로 등극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으며, 어린이들도 종종 이런 먹방 유투버의 세계에 도전하기도 합니다. 왜 먹방이 유행하게 되었는가를 분석해보자면 여러가지 원인들이 거론되겠지만, 저에게 그런 사회과학적인 분석 능력은 부족하므로 이 글에서는 그저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먹방의 대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에리식톤(Erysichthon, Ἐρυσίχθων ὁ Θεσσαλός)은 테살리아의 왕(혹은 지주나 부유한 상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으로 아주 부유하고 거만했습니다. 또한 그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이 가장 멀리 해야하는 부덕(不德)인 신에 대한 불경을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리식톤은 농경지를 더 넓히기 위해, 농경의 여신인 데메테르에게 바쳐진 거대한 숲을 없애 버리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숲을 없애는 과정에서 여신의 신목(神木)으로 숭배되며 화관으로 장식되어 있는, 숲 속 한가운데 서있는 거대한 참나무를 베어버리게 됩니다. 이 나무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님프인 하마드라이어드(Hamadryade, Ἁμαδρυάδες)가 변신한, 매우 신성한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를 베어버리면 여신의 노여움을 살 것이 불 보듯이 뻔했기에, 에리식톤의 가족들과 하인들은 모두 그를 말리려고 했고, 신실한 성격의 늙은 하인 한 명은 나무 앞을 막아서다가 도끼에 베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두의 노력은 에리식톤의 고집을 꺾기엔 역부족이어서 결국 그의 도끼질이 참나무에 닿게 되었습니다. 첫 도끼질에 참나무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신음 소리가 들려왔으나 에리식톤은 도끼질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참나무는 베어져 큰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습니다. 


참나무 속에 깃든 님프의 영혼이 ‘이 원한은 데메테르 여신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라고 저주하였고, 숲 속의 다른 정령과 짐승들도 나무요정의 죽음을 목놓아 통곡하였습니다. 아래 그림은 이러한 비극적 분위기를 극대화 시키기 위해 나무의 님프가 사람의 형상으로 현현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에리식톤의 인성을 볼 때, 님프가 사람의 모습으로 등장했어도 도끼질을 멈추지 않았을 것 같긴 합니다.

하마드라이어드, 1870, Musée Thomas Henry


어쨌든 에리식톤은 숲의 분노와 흐느낌에도 놀라거나 반성하지 않았고, 결국은 데메테르의 징벌(懲罰)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데메테르는 크게 분노하여 그녀가 평소라면 절대 만나지 않았을 신에게, 불경자에 대한 벌을 내려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 신은 바로 기아(飢餓, 배고픔)의 여신인 리모스(Limos, Λιμός)였는데, 리모스는 제우스와 불화와 분쟁의 여신인 에리스(Eris, Ἔρις)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황폐함과 배고픔을 지배하는 여신이었고, 얼어붙은 땅에서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곁에 다가가는 자는 누구나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한 배고픔을 느끼게 되는데, 데메테르는 이 여신에게 에리식톤의 형벌을 담당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이 징벌을 부탁하기 위해 데메테르는 님프 하나를 그녀에게 보내 뜻을 전달하였는데, 그녀조차 리모스를 보자 허기를 견디지 못해 아주 멀리서 데메테르의 부탁만 겨우 전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리모스에게 데메테르의 말을 전하는 님프, 안토니오 템페스타

리모스는 불경한 에리식톤를 벌하기 위해 자신이 머무르던 땅을 떠나 테살리아로 왔고, 밤에 몰래 에리식톤의 침실로 숨어들어 잠자고 있는 그의 피에 자신의 피를 섞어 놓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에리식톤은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끔찍한 배고픔에 시달리게 됩니다. 기아의 여신이 자신의 피를 넣어서 배고픔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 마치 당뇨병이나 갑상선기능항진증에 걸리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는 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먹었으나 배고픔은 그칠 줄 몰랐고, 결국 먹는 것에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도 배고픔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재산을 처분해버린 에리식톤은 그의 딸인 메스트라(Mestra, Μήστρα)까지 팔아서 식량을 샀는데, 그의 딸은 아버지와 달리 매우 신실하고 착한 소녀였고, 포세이돈의 사랑을 받아 변신 능력이 있어 팔려갈 때마다 다른 동물로 변신하여 탈출 후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자식을 파는데도 주저함이 없다는 것을 보면 배고픔에 지배된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지는지 보여주는 예시 같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딸을 잡아먹지는 않았다는데서 그의 부성애를 높이 사야하는 것일까요?

딸을 파는 에리식톤, 안토니오 템페스타


하여간 에리식톤은 계속 돌아오는 딸을 신기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그저 딸을 다시 팔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메스트라를 계속 팔아 식량을 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량 대신 팔려갔던 메스트라는 평소보다 늦게 돌아오게 되었고, 딸이 돌아오기 전에 이미 식량을 다 먹고도 배고픔을 이길 수 없어진 에리식톤은 자기 몸을 먹어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발과 손부터 시작하여 전신을 뜯어먹던 그는 결국 치아만 남아서도 계속 굶주려 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병적인 식욕을 보이는 에리식톤을 보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다루는 폭식증의 모습과도 비슷하게 보입니다. 폭식증을 뜻하는 영단어인 Bulimia는 그 기원이 bous(황소) + limos(배고픔, 기아의 여신 이름)인데, 소를 먹어치울 만큼의 배고픔을 뜻하고 있습니다. 신의 저주로 인해 병적인 식욕을 갖게 된 에리식톤의 모습을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섭식장애의 고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 의학에서 진단하는 폭식 장애(Binge eating disorder)는 조절되지 않는 식욕으로 일정시간 동안 과도한 음식 섭취를 하게 되는 질환이고, 신경성 폭식증(Bulimia nervosa)은 허기 자체보다는 정서적 스트레스로 인해 유발되는 반복적인 과다 음식 섭취와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구토와 극심한 다이어트를 반복하는 질환입니다. 이는 에리식톤이 겪은 기아 증상으로 인한 폭식과는 일치하지 않으나, 이로 인한 환자의 불편감은 매우 커서 치료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현대 의학에서 진단하는 섭식 장애는 인지행동 치료와 약물 치료 등으로 조절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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