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atros May 21. 2021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 단식을 했던 여신

데메테르와 엘레우시스 밀교, 그리고 키케온

데메테르(Δημήτηρ, Demeter)는 로마에서는 케레스(Ceres)라고 불리운 여신이며, 곡물과 수확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농경이라고 하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산업에 대해 맡고 있는 여신이지만 신화 속에서의 등장이 잦은 편은 아닙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에서 종종 조연으로 언급되긴 하지만, 그녀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그녀의 딸인 페르세포네(Περσεφόνη, Persephone)를 되찾기 위한 여정에 관한 것이 거의 유일합니다. 페르세포네를 되찾기 위한 여신의 여정은 '테이큰(Taken)'의 고대 그리스 신화판이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납치된 딸을 찾아나선 특수요원 출신 아버지의 대활약을 그린 2008년도 영화 테이큰(좌)과 데메테르 여신의 신상(우)

위의 두 개의 사진을 비교해보면, 여신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곡물 다발이 묘하게 테이큰 주인공의 권총처럼 보입니다. 페르세포네 이야기 속에서 딸을 잃은 여신의 슬픔과 분노는 현대인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죠.


이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승의 신인 하데스(ᾍδης, Hades)는 우연히 지상에 산책을 나왔다가, 꽃밭에서 님프들과 노닐고 있는 페르세포네를 보고 반하여 그녀를 지하세계로 납치하게 됩니다. 하데스가 자신의 조카라고 볼 수 있는 페르세포네에게 반하게 된 계기는 '에로스'의 장난 때문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어쨌든 그가 벌인 납치극의 결과는 매우 참담했습니다. 이번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예정이지만, 이 납치 사건에 대한 데메테르 여신의 분노로 인해 그리스 전역을 뒤덮는 가뭄과 기근이 발생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페르세포네의 납치. 이것은 베르니니가 만든 조각상입니다.

위의 조각상에서는 납치 당하는 순간의 페르세포네의 절망감이 잘 느껴집니다. 그리소 하데스의 발치에는 세 개의 머리를 지닌 지옥의 파수견 케르베로스가 보입니다.



처음에 자신의 딸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몰랐던 데메테르는 딸을 찾기 위해 그리스 전역을 헤매어 다니게 됩니다. 딸을 잃은 슬픔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초췌한 모습이 되어 떠돌고 있을 때, 아테나 근처의 엘레우시스(Eleusís)라는 마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엘레우시스 지방을 다스리던 왕가의 환대를 받았고, 그들의 따뜻한 위로와 보살핌에 감동 받은 데메테르는 커다란 선물을 주고자 마음을 먹게 됩니다(물론 그들은 여신인 줄 모르고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바로 왕자인 데모폰(Demophon, Δημοφῶν)울 불사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인간들이 이해하긴 어려운 것이었기에(각주 1), 비밀스럽게 아이를 불 속에 넣고 있던 데메테르를 발견하고 놀란 왕비와 유모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야기에 따라서는 불멸성을 갖지 못하기만 했다고도 하고, 혹은 아이가 불에 타 죽어버렸다는 끔찍한 결말도 전해집니다.


여신은 데모폰의 불멸화에는 실패했으나, 이 왕가에 불로불사만은 못한 것이라도 자비와 은총을 베풀어주고자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후,  데모폰의 형제인 트리프톨레모스(Τριπτόλεμος, Triptolemos)에게 농경 기술 및 신비로운 비밀 의식에 대해 전수합니다. 그 의식이 바로 '엘레우시스의 밀교 혹은 비의(Ἐλευσίνια Μυστήρια, Eleusinian Mysteries)' 입니다.


이 종교는 일종의 고대 농업 컬트 종교라고 할 수 있는데, 살인의 전과가 없고 그리스어를 말할 수 있다면 누구든 참여가 가능하지만, 그 내용에 대한 비밀 엄수를 중시하여 정확한 교리나 가르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대밀의제전(Greater Mysteries)이라는 종교 행사가 늦여름 시기에 있었다고 하며, 이 때 데메테르 여신이 했던 단식을 기념하여 참가자들도 하루 동안 단식을 하고 키케온(Kykeon)이라는 음료를 마셨다고 합니다.

엘레우시스 밀교 제전을 묘사한 '닌니온 타블렛'의 그림(좌)와 키케온(붉은 원 안)을 보여주는 그림(우)


여신의 단식 및 키케온이라는 음료에 관한 신기한 이야기가 있는데, 데메테르 여신이 딸을 찾아 아티카(Αττική, Attica-여기도 아테나 근처입니다) 지방을 헤매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에도 여신은 딸을 잃은 슬픔에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미스메(Misme)라는 여인이, 여신을 안타깝게 여겨 물과 보릿가루, 그리고 박하를 섞어 만든 음료를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키케온'이라고 합니다(각주 2). 


미스메는 정말 지혜로운 여인이었던 것이, 오랫동안 굶은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고칼로리의 음식을 잘 못 주면 영양재개증후군(refeeding syndrome)으로 사망에 이르게 만들 수 있으므로 키케온과 같은 부담 없는 음식을 주는 것은 매우 적절했습니다(각주 3). 


게다가 박하(mint)를 넣었다는 것도 오래 간만에 다시 식사를 시작하는 사람에겐 도움이 되는 레시피로 볼 수 있는데, 박하의 성분이 소화 기능에 도움을 주어 위장관 기능이 저하되었거나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에게 좋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각주 4).

박하(학명: Mentha canadensis)

이 박하에 대해서는 데메테르의 딸인 페르세포네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하데스가 '멘타'라는 님프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보고 화가 난 페르세포네가 님프를 발로 밟아(!) 죽였다고 합니다. 님프는 죽은 후에 박하풀로 변하였는데 밟힐 수록 향이 더 진해지는 풀이 되었다고 하죠. 저승의 여왕이 된 후에는 상당히 불같은 성격을 갖추게 된 것도 같습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데메테르 여신이 박하가 들어간 키케온을 먹고 만족한 후에 미스메에게 선물을 선사하는 훈훈한 이야기로 끝나면 좋았겠으나,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돌발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바로 미스메의 아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미스메의 아들인 아스칼라보스(Ascalabus, 혹은 라틴어로 Stellio)가 허겁지겁 키케온을 마시는 데메테르를 보고 '게걸스럽게 먹는다'며 비웃은 것이었습니다. 가뜩이나 딸을 잃고 힘든 상태인 데메테르에게 인간 아이의 비웃음은, 불 위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데메테르는 아스칼라보스에게 음료를 뱉어내며 저주를 하였고, 아이는 '도마뱀'으로 변하였다고 합니다. 

키케온을 마시는 데메테르를 비웃는 아스칼라보스(좌)와 아스칼라보스를 도마뱀으로 변하게 하는 데메테르(우)


데메테르가 비교적 온화한 여신임에도 이와 같이 벌을 내리는 것을 보면, 어린 아이도 피해갈 수 없는 불경죄의 무서움을 알려주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습니다. 




* 각주

1. 아이의 몸에 불사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를 붓고 입으로는 여신의 숨결을 불어 넣은 후, 불 속에 넣어 필멸의 혼을 태우는 방식이었습니다.

2. 키케온의 제조 방법은 다양하여, 꿀이나 와인 등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3.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포로로 있던 영양실조 상태의 미군에게 고칼로리의 음식을 공급하였다가 사망에 이른 사례들이 있습니다.

4. Review article: The physiologic effects and safety of Peppermint Oil and its efficacy in irritable bowel syndrome and other functional disorders. Bruno P. Chumpitazi, et al. 2019. Aliment Pharmacol Ther.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스 신화 속의 최초의 수술과 최초의 약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