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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May 27. 2021

왜 '늑대'라고 불리워야 했는가?

빨간두건과 루푸스

빨간 두건(불어: Le Petit Chaperon rouge / 영어: Red Riding Hood)은 서양의 유명한 동화 중 하나로, 중세 시대부터 전해지던 민담이 동화로 정착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입니다.


이 동화의 내용을 다음과 같습니다. 

빨간 두건을 쓴 어리고 순진한 소녀가 할머니 병문안을 가던 중 늑대를 만나게 됩니다. 늑대는 소녀가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자신이 지름길로 할머니 집에 먼저 도착하여 할머니부터 삼킨 후에 할머니로 분장하고 기다리다가 빨간 두건 소녀까지 삼키게 됩니다. 포식 후에 배가 불러진 늑대는 그대로 할머니집에서 잠들었는데, 지나가던 사냥꾼이 잠든 늑대의 배를 갈라 할머니와 소녀를 구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대신 바위를 잔뜩 넣어 늑대의 배를 꿰매놓았는데(사냥꾼인가 의사인가...), 자다가 깬 늑대는 목이 말라 호수에 갔다가 돌의 무게때문에 몸이 고꾸라져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순진무구한 주인공이 교활한 악당에 의해 위기에 빠졌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사냥꾼의 등장으로 구원 받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빨간 두건. 19세기 그림.

이 동화는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 1628년 ~ 1703년)라는 프랑스의 작가에 의해 처음으로 동화의 형태로 정착되었는데, 이후 프랑스 뿐만 아니라 독일의 그림(Grimm) 형제에 의해서도 '빨간 모자(Rotkäppchen)'라는 제목의 이야기로 재탄생 되었고, 유럽을 비롯한 서양 문화권 내에서 널리 읽히는 동화가 되었습니다.


이 동화를 읽어 보면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늑대의 활약이 매우 두드러지는데, 이는 유럽권에서 맹수였던 회색 늑대(학명: Canis lupus)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회색늑대(좌)와 회색 늑대의 서식 지역(우). 지도 상에서 붉은 색으로 표시된 곳은 이미 회색늑대가 멸종한 지역이며, 초록색으로 표시된 곳은 아직 늑대가 서식하는 지역입니다.

회색 늑대는 현대에는 유럽이나 북미 지역과 같이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거의 절멸되었으나, 이전까지는 굉장히 다양한 지역에서 서식하던 동물이었으며,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커다란 고양이과 맹수가 거의 없던 유럽이나 북미 지역에서는 인간을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짐승의 이미지로 차용되던 것이 바로 늑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동양에서는 호환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서양에서는 웨어울프, 루가루, 그리고 라이칸슬로프와 같은 늑대인간 괴담이 많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무리지어 사냥하는 늑대들은 사람을 공격해서 상처를 입히거나 죽음에 이르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늑대들에게 물린 경우에는 상처 자체의 출혈도 있으나 광견병(Rabies) 바이러스 감염을 일으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각주 1).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않더라도 물린 자리에 피부 괴사가 일어나 심각한 흉터를 남게 만듭니다(각주 2).


예전부터 유럽에 살던 사람들은 이러한 '늑대에 물린 상처'를 많이 접했을 것이며, 특히 의사들에게는 더욱 익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다양한 환자들을 접하던 도중, 늑대에게 물린 적이 없으나 그와 닮은 피부 병변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전신 홍반성 루푸스(Systemic Lupus Erythematosus, SLE)에 의해 나타난 피부 병변을 지닌 환자들이었습니다.


전신 홍반성 루푸스는 ‘만성 염증성 자가면역성 질환’의 하나로, 세포핵의 특정 단백질에 대한 항체가 체내에서 형성되어, 스스로의 면역체계에 의해 공격 받게 되는 병입니다. 전신성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듯이 심장, 폐, 신장, 조혈기관, 신경계, 관절, 그리고 피부 등 신체 여러 부위에 자가면역반응에 의한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특히 피부에서 나타나는 증상이 외부에서 관찰이 쉽고 특징적이어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뺨발진(malar rash or butterfly rash)이라는 불그스름한 얼굴 피부 병변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발진 부위에 흉터가 생기는 원반형 발진(Discoid rash)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붉은 빛의 피부 발진이 나타나면 치 늑대에 물린 상처와 비슷해 보인다고 합니다.

뺨발진(Malar rash)-위키피디아.

이로 인해, 피부 병변이 늑대에 물린 자국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lupus (라틴어로 늑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지며, 한문으로도 늑대에 물린 상처라는 '낭창(狼瘡)'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루푸스에 대해 검색을 해보시면 이 늑대와 관련된 이야기가 거의 다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루푸스라는 표현을 가장 먼저 사용한 것은 이탈리아 살레르노에 살던, Rogerius (before 1140 – c. 1195)라는 외과의사였다고 합니다(각주 3). 그러나 이후로도 이 용어가 완벽하게 정착된 것은 아니어서 'noli me tangere (나를 만지지 말라)' 혹은 'herpes esthiomenos'와 같은 이름으로도 불리웠습니다. 

현대 의학에서 사용하는 'Lupus eryhtematous'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은 1851년의 일로, 프랑스 파리에서 살던 피부과 의사인 Pierre Louis Alphée Cazenave (1795년 – 1877년)이 명명한 것입니다(각주 4).

Pierre Louis Alphée Cazenave의 초상화.


저는 루푸스에 대해 조사를 하던 도중, Cazenave라는 의사가 왜 'Lupus'라는 표현을 정착시키게 된 것일까에 대해 잠시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이미 이전에도 다른 의사들에 의해 종종 사용되던 표현이어서 붙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루푸스의 피부 병변의 특징과 샤를 페로의 '빨간 두건' 동화를 같이 생각하다보니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습니다.


루푸스 환자의 절반 이상이 광과민성(Photosensitivity)을 지녀, 햇빛(자외선)에 노출되었을 때 피부 병변이 악화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떠올리니, 아마도 예전에 살던 루푸스 환자들은 자신의 피부 병변 자체를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마음과 햇빛에 노출되면 악화되는 것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두건'을 쓰고 다니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두건을 쓰고 의사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을텐데, 그 두건을 쓴 환자가 보여주는 피부 병변은 늑대에 물린 상처와 흡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환자의 두건과 상처 모양을 본 의사가 '빨간 두건'이라는 동화 내용에 익숙한 프랑스의 사람이었다면, 순간적으로 빨간 두건 이야기 속 늑대가 연상되진 않았을까요?


물론 그 의사가 이와 같은 내용을 기술한 바는 없기 때문에, 루푸스의 병명 짓기와 빨간 두건과의 연관성은 어디까지나 제 상상의 산물입니다. 만약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저 의사와 한 번쯤은 편지를 주고 받고 싶어졌을 것 같습니다.




*각주 

1. A Wild Wolf Attack and Its Unfortunate Outcome: Rabies and Death. Süha Türkmen, MD, et al., WILDERNESS & ENVIRONMENTAL MEDICINE, 23, 248–250 (2012).

2. A comparison of bitemark injuries between fatal wolf and domestic dog attacks. J K Wong et al., J Forensic Odontostomatol. 1999 Jun;17(1):10-5.

3. Systemic Lupus Erythematosus. Eleftherios Pelechas, et al., Illustrated Handbook of Rheumatic and Musculo-Skeletal Diseases pp 141-166. 2018.

4. The history of lupus erythematosus. From Hippocrates to Osler. CD Smith, M Cyr. Rheum Dis Clin North Am. 1988 Apr;1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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