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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Jun 03. 2021

님프들은 어째서 음란함의 상징이 되었나?

님포마니아의 어원

성욕은 인간의 가진 본능이며, 인류가 번성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잘못된 성욕의 발현도 있으며 그런 것을 정신의학 용어로 이상성욕(異常性欲, paraphilic disorder)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는 성기능장애(sexual dysfunction)의 일종으로, 성장애(性障碍, sexual disorder)의 하위 분류에 속합니다. 이상성욕에는 양적 이상과 질적 이상이 있는데, 아래에 나올 여성색정증(Nymphomania)은 양적 이상에 해당되는 것으로 성욕에 관계된 충동이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높아 다수의 인원과 성교를 하거나 성욕에 관계되는 행동들을 원하는 여성에게 진단하게 됩니다. 

님포매니악 영화 포스터. 2013년 작품. 라스 폰 트리에 감독.


그리스 신화 속에서 신, 인간, 여러 신비한 괴물들과 더불어 흔하게 등장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님프(Nymph, νύμφη)입니다. 매우 아리따운 용모의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그런 외모 탓인지 한국에서는 요정(妖精)이란 단어로 번역해서 쓰기도 합니다. 특정한 장소(강, 호수, 연못 등)나 자연물(나무, 꽃 등)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러한 장소 및 자연물들과 생사를 함께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들의 목숨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르는 자연물들을 손상시키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으며, 앞서 나왔던 여러가지 이야기 속에서 님프가 깃든 자연물을 다치게 한 인간들의 비극적인 최후(에리식톤 이야기 등)를 볼 수 있었습니다.

힐라스와 나이아데스(강과 연못의 님프들). 1896년. 워터하우스 작품.


신통기(神統記, Theogony, Θεογονία-신들의 계보가 적혀진 글입니다)의 저자 헤시오도스(Hesiod, Ἡσίοδος)에 따르면 님프의 수명은 대략 인간의 2만배 라고 합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거의 불사에 가까울 뿐더러 늙지도 않고, 미약할지언정 인간은 부릴 수 없는 여러가지 신통력을 보이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거의 신처럼 느껴지는 존재들입니다. 인간 주위에 가까이 있는 신성한 존재로서 숭배 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일종의 자연숭배(애니미즘, animism)가 그리스 신화 체계 속으로 통합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왼쪽부터 헤시오도스의 쳥동 흉상, 헤시오도스와 뮤즈 여신(귀스타프 모로, 1891), 신통기 한글판.


그런데, 어째서 이 신비한 존재들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질병의 이름이 여자색정증인 것일까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요정의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 속의 요정들은 수많은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인간들과의 수많은 연애담이 신화 속에서 등장하개 되죠.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기도 합니다. 물론 원치 않은 사랑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회피하지만, 그녀들이 마음에 둔 존재에게는 매우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사랑을 나누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사랑의 끝이 항상 해피엔딩은 아니고, 신이나 인간을 사랑했다가 버려지거나(아래 그림 속 오이노네-Οἰνώνη, Oenone), 사랑을 이루었다가도 여러 가지 문제로 헤어지거나, 짝사랑만 하다가 죽어가는 일도 있었으나 그녀들은 언제나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영원히 젊고 아름다운 존재들에게는 사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사랑의 일부는 자신들에게도 나눠지면 좋겠다고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파리스와 오이노네. 1577년 작품.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의 첫 아내인 오레아스(산의 님프), 결국 헬레네와 결혼한 파리스에게 버려지게 됩니다.


반대로 남성색정증(satyriasis)이란 병명은 또 다른 신화 속 존재의 이름에서 기원합니다.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사티로스(satyr, Σάτυρος)는 디오니소스의 시종의 역할을 하는 정령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나온 목양신 ‘판’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승에 따라서는 사티로스는 염소가 아니라 말의 다리(켄타우로스처럼 말의 하체 전부를 지닌 것은 아니고 다리는 두 개이나 말의 다리 형태)를 지녔다고 합니다. 전승에 따라서는 말의 꼬리만 달려있기도 합니다.

술의 신의 시종 답게 장난을 좋아하고 색을 밝히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그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조각상들을 보면 항상 발기가 되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아마 이러한 모습에서 착안하여 남성이 색정증의 증상을 가질 경우에는 사티로스의 이름을 따서 병명을 만든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티로스들은 님프들과 어울리거나 다투기도 하며 여러 이야기 속에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사티로스를 묘사한 그림(좌)과 님프와 다투는 사티로스의 모습을 나타낸 부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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