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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Jun 08. 2021

메두사의 저주처럼 치명적인 간경변증

'메두사의 머리'라고 불리는 증상

메두사(Medusa, Μέδουσα)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굉장히 유명한 괴물 중 하나입니다. 전승에 따라서는 원래 고르고 세 자매라는 괴물들 중에 하나였다고도 하고, 혹은 머리카락이 아주 아름다운 미녀였다고도 합니다.

메두사의 머리


미녀였다는 설정에 따르면,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아테나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다가(혹은 겁탈을 당했다고도 합니다), 자기 신전에서 부정한 짓을 했다는 것에 화가 난 아테나 여신(각주 1)의 저주를 받아서 괴물로 변한 것이라고 합니다.

아테나의 저주에 의해 메두사의 아름답던 머리카락은 흉측한 뱀으로 변하고, 그녀의 눈은 마주치는 사람을 모두 돌로 만들어버리는 힘을 가진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죠(각주 2).

영화 [퍼시 잭슨과 번개 도둑]에 나오는 메두사와 그녀에 의해 돌로 변한 사람들의 모습. 퍼시(Percy)는 '페르세우스'의 영어식 이름입니다.


메두사는 괴물로 변한 이후로는 아무도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외진 곳에서 숨어지냈으나, 신화 속 영웅 중 하나인 페르세우스(Perseus, Περσεύς)에 의해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서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


목이 잘릴 때 나온 메두사의 피가 바닷물에 떨어지자 거품이 일고 그 거품 속에서 하늘을 나는 말 페가수스(Pegasus, Πήγασος)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페르세우스는 이후에 메두사의 머리와 페가수스의 힘을 빌려 바다 괴물을 물리치고 에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Andromeda, Ἀνδρομέδα)를 구출하여 그녀와 결혼하게 됩니다.


잠깐 샛길로 빠지자면, 여기서 나오는 안드로메다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화가 안드로메다로 간다.’라는 농담을 할 때 언급되는 바로 그 ‘안드로메다’로서, 현대에는 별자리와 은하의 이름에 붙어있습니다.


사실 이 공주님은 아름답고 착한 전형적인 동화 속 여주인공 같은 여성이었으나, 그녀의 어머니인 카시오페아(Cassiopeia, Κασσιόπη) 왕비가 거만한 성격이라 그리스 신화 속 최대의 금기인 ‘여신들(각주 3)의 미모보다 내 딸이 낫다!’는 망언을 내뱉는 바람에 바다 괴물이 쳐들어오고 딸을 제물로 바쳐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늘에서 백마를 타고 내려온 왕자 사윗감(각주 4) 덕분에 딸과 나라를 모두 구하게 됩니다. 물론 오만의 대가로 카시오페아는 의자에 묶인 채 거꾸로 매달린 자세로 하늘의 별자리가 됩니다.

에티오피아의 왕 케페우스와 여왕 카시오페이아가 페르세우스에게 감사 (1679). 피에르 미그나르.


페르세우스는 모든 모험을 마친 후(그리스 신화 속에서 드물게 해피엔딩을 맞이한 영웅입니다), 자신을 도와준 아테나 여신에게 감사드리는 의미로 메두사의 머리를 바쳤습니다. 


아테나 여신은 그 머리를 자신의 방패인 아이기스(Aegis, αἰγίς) 앞에 붙여 장식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아마 메두사의 힘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최강의 방패가 되었을테죠. 그래서인지 현대 군사 용어 중에서 방공 중심 전투체계의 이름이 바로 이지스 시스템(Aegis Combat System, ACS)입니다.

아이기스 방패를 들고 있는 아테나 여신.


다시 돌아와서, 이 사연 많은 메두사의 머리는 뱀들이 꿈틀대는 형상의 머리카락이 가장 큰 특징인데, 메두사의 머리라는 단어를 라틴어인 ‘Caput medusae’로 검색해보면 진짜 메두사의 머리를 그린 예술 작품 뿐만 아니라 사람의 복부(腹部) 피부에 혈관이 도드라져 있는 사진이 나오게 됩니다.

Caput medusae. 출처-https://www.healthline.com/health/caput-medusae


이것은 간의 기능이 망가졌을 때(Liver failure), 문맥 고혈압(Portal hypertension)이 발생하고 이에 의해 얕은배벽정맥(superficial epigastric veins)이 뱀처럼 도드라져 보이게 되는 증상입니다. 이 모습이 흡사 전설 속의 메두사 머리와 흡사해 보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된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간기능이 떨어질 때는 보통 간이 돌처럼 딱딱해지는 간경화(肝硬化) 혹은 간경변증(肝硬變症, Liver cirrhosis) 증상이 나타나는데, 메두사의 능력이 자신과 눈을 마주친 모든 생물을 돌로 만드는 것이란 점을 떠올려 보면 여러모로 잘 붙여진 증상 이름인 듯합니다.





*각주


1. 그리스 신화 속에서 가장 신성하게 여겨지는 스틱스 강에 혼인하지 않기로 맹세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전에서 벌어진 상황에 더 분노했던 같습니다.


2.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3. 정확히 말하면 바다의 옛신인 네레우스의 딸들인 네레이데스.


4. 페가수스는 보통 백마로 그려지며, 페르세우스도 아르고스라는 왕국의 왕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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