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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Jul 12. 2021

영화 [블랙위도우] 감상 후기

자유를 꿈꾸는 고르고 자매들

지난 주말에 보고 온 영화, [블랙위도우]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평입니다.

스포일러가 될만한 것은 별로 없을 것 같으나, 뜬금 없이 그리스-로마 신화와 엮어서 해석합니다.



이번에 극장에 걸린 [블랙위도우]는 MCU 어벤져스의 원년 멤버인 '블랙위도우(나타샤 로마노프)'의 퇴장을 기념(?)하는 솔로 무비입니다.

블랙위도우 포스터 - 나타샤 버전. 이번에는 '블랙위도우'란 이름과 달리 주로 '백색 의상'을 입고 활약합니다.


나타샤는 [어벤져스-엔드게임]에서 이미 사망한 상태이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영화 [시빌워]와 [인피니티워] 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루면서 그녀의 떠남을 아쉬워할 기회를 줍니다.

이 영화는 블랙위도우라는 히어로의 과거를 다루면서, 그녀의 인간적인 고뇌와 슬픔도 보여주고, 그녀가 어벤져스를 '가족'이라 여기며 소중히 여기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줍니다.


최근 스케일이 우주적이 되어버린 어벤져스 시리즈와 달리,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주로 펼쳐지며 타격감이 느껴지는 액션과 자신의 인생을 빼앗기고 무기처럼 살아온 사람들을 다루는 스토리를 모두 흥미롭게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즐겁게 영화를 보고 나와서 다시금 내용을 떠올려보니, 영화 속에 등장하는 훈련된 여성 스파이들인 '위도우'들에게서 문득 그리스-로마 신화 속 괴물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고르고 자매'입니다.

고르고 조각상. 1476년. 이탈리아 시실리에 있는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작품.


고르고(Gorgon,  Γοργώ - 무시무시한, 끔찍한, 크게 소리치는) 자매는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 나오는 유명한 괴물 중 하나입니다.

이 자매는 포르키스(Phorcys, Φόρκυς)와 케토(Ceto, Κητώ)라고 하는 바다 괴물들(각주 1)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입니다. 그녀들이 사는 곳은 같은 부모 밑에서 태어난 자매인 그라이아이(Graiai, Γραῖαι)만이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각주 2). 


고르고 자매는 스테노(Sthenno, Σθεννω - 강한), 에우리알레(Euryale, Ευρυαλη - 멀리 나는, 방황하는), 그리고 메두사(Medusa, Μεδουσα - 여왕, 보호자)라는 세 명이었으며, 이 중 메두사가 페르세우스 이야기에서 빌런으로 나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메두사 혹은 세 자매 모두 눈을 마주친 상대방을 돌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고 하며, 이 중 메두사만이 필멸의 운명을 타고나서 페르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아테나 여신의 방패에 그 머리가 붙여지게 됩니다.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베인 후 아테나의 방패에 부착된 메두사의 머리.


블랙위도우인 나타샤 로마노프를 메두사라고 생각한다면, 레드룸과 단절(메두사로서의 죽음) 이후 S.H.I.E.L.D(쉴드)에서 히어로로 활동하는 모습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어벤져스-엔드게임]에서 '사망'하는 설정도 어느 정도는 메두사의 운명과 닮아 있구요).


아테나의 방패(=쉴드)인 아이기스(Aegis)에 부착된 메두사의 머리처럼, 블랙위도우인 나타샤도 스파이로서의 과거를 버리고 쉴드라는 기관에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만 남았을 때도 상대방을 돌로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유지한 메두사처럼, 블랙위도우 역시 자신이 스파이로서의 능력을 어벤져스 팀을 위해 계속 발휘하게 되죠.

쉴드 요원으로 활동 중인 블랙위도우(아이언맨2). 저 착지 자세(랜딩 포즈)가 이번 영화에서는 나름 히어로로서의 정체성처럼 묘사됩니다.


나타샤가 메두사라면, 좀 더 묵직하고 강한 액션을 선보이는 엘레나(배우: 플로렌스 퓨)는 스테노처럼 느껴지고, 나타샤보다 선배 위도우이자 이야기의 시작점에서 머나먼 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멜리나(배우: 레이첼 와이즈)는 에우리알레를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나는 '강하다'는 뜻을 지닌 스테노를 연상시킵니다(좌). 정체를 숨긴 채 멀리 떠돌아다니는 멜리나는 에우리알레의 이름뜻과 비슷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우).


물론 이 세명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 나오는 수많은 '위도우'들은 모두 고르고 자매처럼 느껴집니다.

괴물들에 의해 괴물로 태어나 영웅의 대적자로서 죽어가야했던 고르고 자매들처럼, 위도우들 역시 냉전 시대와 드레이코프  장군이라는 그릇된 욕망의 소유자(사실 진정한 괴물은 이 사람)가 만들어낸 서글픈 존재들이며, 세뇌 당한 채 전쟁터 총알 받이나 자살폭탄테러범으로 키워지는 소년병들과 비슷하여 보는 내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드룸에서 양성된 인간병기인 '위도우'들'


영화 후반에 밝혀지는 테스크마스터(Taskmaster)라는 존재의 정체까지 알게되면 안타까움이 더욱 커지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 욕심을 위해 어디까지 인간성을 버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시이기 때문이죠.

테스크마스터는 '고르고 자매'라기 보다는 미노타우르스(미노스 왕에 의해 미로에 가두어진)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 직접 영화를 보신다면 왜 제가 이러한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테스크마스터(좌)와 미노타우르스(우)


고르고 자매는 신화 속에서는 그저 페르세우스를 빛내주기 위한 악당 조연일 뿐이었지만, 이번 영화 속 위도우들은 주연이 되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싸워나갑니다.

[블랙위도우]가 고대의 이야기가 아닌 현대의 이야기이기에,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반기를 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결말은 배급사인 꿈과 희망의 디즈니를 믿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ㅎㅎ.



신화 이야기와는 별개로, 위도우들의 자유의지를 각성시키는 '붉은 색으로 빛나는 해독제'는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빨간약의 오마쥬일까?란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기계들을 위해 생체전지로 사용되는 인간들의 냉혹한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빨간약'처럼, 무기로 길러져 이용 당하는 위도우들의 처지를 인지하게 만들어주니까요. 

혹은 프랑스 국기에 있는 붉은 색처럼 위도우들 간의 '우애'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영화 초반에 나오는 '생체 발광(Bioluminescence)'이란 개념을 다시 활용하기 위해 일부러 어둠 속에서도 붉게 '빛나는' 형태로 만든 것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마블 팬 여러분들 모두 [블랙위도우]를 즐겁게 감상하시기를 바랍니다.





***각주

1. 포르키스(남성)와 케토(여성)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태초의 신 중 하나인 바다의 신 폰토스(Pontos, Πόντος)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케토는 페르세우스 영웅담에서, 안드로메다 공주를 잡아먹기 위해 나타났던 괴물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2. 그녀들은 날 때부터 노파였으며 하나의 눈과 이빨을 함께 사용하였는데, 그 눈은 무엇이든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앞서 나왔던 아틀라스 이야기 속 헤스페리데스가 살고 있는, 땅의 서쪽 끝에서 숨어 살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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