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비코스의 두루미
제가 프로파일러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방송 등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써본 내용입니다.
부족하거나 틀린 부분이 있다면 의견 부탁 드립니다!
코로나로 외출이 줄어든 요즘, TV나 유투브를 보다보면 과거의 범죄 사건들을 재조명하며 사건과 범인에 대해 설명해주는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들을 보게 됩니다. 범죄 심리분석이라 할 수 있는 프로파일링(criminal profiling)을 전문적으로 하는 분들이죠. 범죄심리학자라는 직함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범죄심리학자들이 사건에 대한 자문을 하는 경우도 많아 두 용어가 바슷한 의미인 것처럼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분들은 본인들이 겪었던 사건 혹은 겪지는 못했으나 리뷰했던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러한 분야의 문외한인 저같은 사람이 듣기에도 매우 흥미진진하고 한 편으로는 방향만 다르지 '질병'과 그를 겪는 환자들에 대해 고민하는 의사들과 비슷한 점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실제 법의학을 전공하는 의사들은 부검을 통해 범죄 해결에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하기도 하는데, 법의학자들이 어려가지 검사 결과를 해석하여 진단에 도움을 주는 파트 의사와 비슷하다면, 프로파일링을 하는 분들은 임상에서 직접 환자를 보는 의사들과 흡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거나 범죄자의 유형을 분류하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범죄자의 프로파일을 도출해낸다는 점에서도 의사와 비슷하고, 용의자와 면담하고 라포(Rapport, 치료, 교육을 위해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를 형성하여 그를 통해 자백을 이끌어내거나 범행에 관련된 단서를 얻는 과정 역시 환자와 면담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고 치료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사의 역할과 흡사해보입니다.
추리 소설 주인공으로 가장 유명한 탐정 '셜록 홈즈'도 작가인 '아서 코난 도일'이 안과 의사 출신이라, 홈즈의 추리 과정이 의사의 진단 과정과 비슷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는데, 결국 추리의 과정에서 필요한 여러가지 분석이 프로파일링이라 할 수 있으니... 의사-셜록 홈즈-프로파일러들이 비슷해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서론이 매우 길어진 것 같은데, 이번 글에서는 프로파일러들을 제가 좋아하는 '시' 속에 등장하는 '복수의 여신들'에 비유해보고자 합니다.
그 시는 바로 '이비코스의 두루미(Die Kraniche des Ibykus, 영어: "The Cranes of Ibycus")' 입니다.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라는 독일의 극작가이자 철학자가 1797년에 지었던 서정시로, 지어진 시대는 18세기 말이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기원전 6세기)에 살았던 시인 '이비코스(Ibycus, Ἴβυκος)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이비코스는 현재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도시인 레기움(Rhegium, 현재는 Reggio) 출신의 시인입니다. 그가 살던 시기에는 이탈리아 남부에 여러 개의 그리스 식민 도시가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방랑시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그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곳은 그리스의 사모스(Samos) 섬이었습니다(각주 1). 그 당시의 사모스는 폴리크라테스(Polycrates, Πολυκράτης)라는 참주가 다스리던 도시였습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창작활동을 하다가 다시 고향인 레기움으로 돌아가서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경연대회를 참석하기 위해 떠났다가 강도를 만나서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습니다(플루타크 등에 의한 전승).
프리드리히 쉴러가 지은 시는 후자의 설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진 것입니다. 시의 내용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운문을 산문 형식으로 바꾸고 편집하여 적어봅니다).
이비코스는 고대 그리스 코린토스(Corinth)의 이스트모스(Isthmus) 지역에서 열리는 이스트모스 경연대회(각주 2)에 참여하러 가는 길에 남쪽으로 이동하는 두루미떼를 보고 반가워하며 인사를 전합니다.
그는 경연대회에서 얻을 영광을 상상하며 즐겁게 소나무 숲길을 걷고 있었죠. 그러나 이 길에서 그는 강도들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시인일 뿐 전사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던 이비코스(부드러운 리라의 현을 타던 그의 손은 활 시위는 당겨본 적이 없었다고 묘사됩니다)는 결국 강도들에게 심하게 맞아 쓰러져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날아가던 두루미떼를 보며 자신의 살인을 고발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때의 묘사를 보면 심하게 맞아 눈이 부었거나 뇌손상이 오며 시각에 이상이 왔는지 '이미 앞이 보이진 않았으나 두루미떼가 우는 소리와 날개짓하는 소리를 선명하게 듣고' 위와 같은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죄 없는 시인의 참혹하고 비극적인 죽음의 광경이었죠.
강도들은 달아났지만, 이비코스의 시체(옷까지 다 벗겨 갔는지 벌거벗은 시체라고 나옵니다. 범죄자들의 악랄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죠. 옷조차 팔려고 했거나 피해자의 신원을 감추려고 노력한 흔적일 수도 있겠습니다.)는 코린토스에 살던 그의 친구에게 발견됩니다.
그 친구는 이비코스의 이비코스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만나다니... 너의 영광에 어울리게 최고의 음유시인이 받는 소나무관을 너의 관자놀이에 쓰기를 바랬건만..." 이라고 말이죠. 영광의 소나무관 대신 관자놀이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친구의 모습에 커다란 슬픔과 절망을 느낀 것이 독자에게도 전달됩니다.
지금으로 치면 유명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위대한 시인의 죽음에, 경연대회에 참가한 사람들과 코린토스의 시민들은 모두 분노를 금치 못하였고, 시청사로 달려가 죄인을 찾아내 벌 줄 것을 탄원합니다. 그러나 범죄자들은 딱히 증거를 남기지 않았고(단순 강도인지 경연의 라이벌이 벌인 짓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들이 이 축제의 현장에 태연하게 스며들어 즐기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다들 더욱 원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현대의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들이 잡히지 않고 미제 사건으로 남았을 때, 피해자 가족과 여러 선량한 사람들이 느껴야할 분노와 공포심과도 비슷하죠.
이비코스 사건의 범인들이 유유히 도시를 거닐고 있을 때쯤, 경연대회의 막이 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막 공연을 보기 위해 원형극장으로 몰려들었죠.
그런데 원형 극장에 한무리의 합창단이 들어오자 분위기가 바뀝니다.
무언가 '이 세상의 존재 같지 않은 여성들'이 들어와 극장 무대를 돌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오싹한 느낌마저 감돌기 시작했죠. 그 여성들은 걸음걸이도 무언가 사람들과 달랐고, 모두 검은 외투를 입고 횃불을 들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이 뺨주위에서 나풀거리는데, 마치 똬리를 튼 뱀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들이 부른 노래는 대략 다음과 같았습니다.
"마음이 정결하고 죄 없는 자는 행복할지어다.
그러나 남몰래 살인한 자는 불행할지어다.
우리들 밤의 무서운 동족들은 그의 전신을 노리고 있다.
우리는 그를 추격하여 더 빨리 날으리라.
우리 뱀들을 그의 발에 감기게 하여 넘어뜨리리라.
끈질기게 우리는 추격하리라.
죽을 때까지 추격하여 그에게 안정도 휴식도 주지 않으리라."
이들의 고요하나 힘있고 엄숙한 노래는 죄인들의 마음 속에 은밀한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며 극장 위로 검게 무리지은 두루미떼가 날아가자 범인 중 한 명이 무심코 “티모테우스, 저기 봐라, 저기. 이비코스의 두루미야,” 라고 외치고 말았습니다.
이비코스라는 그리운 이름과 '이비코스의 두루미'라는 단어가 나오자, 관객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외친 자와 그 말을 들은 자가 바로 범인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성한 시인을 위한 에우메니데스(복수의 여신인 에리니에스의 다른 이름)의 복수가 이루어졌음을 확신하며 범인들을 잡아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우게 됩니다.
시 속에 나오는 에리니에스(Erinyes, Ἐρινύες-각주 3) 여신의 기원에 대해서는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의 성기가 잘릴 때 흐른 피가 땅에 떨어져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밤의 여신 닉스와 하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거나, 닉스의 어둠 자체에서 생겨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 지하에서 살고 있으며, 핏빛으로 붉게 빛나는 눈, 청동 날개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모두 구불거리는 뱀 형태로 죄인을 물기 위해 겁을 준다고 하며, 보통은 횃불을 들고 있는 무서운 처녀의 모습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이 모습이 심히 무서워 그녀들을 본 사람들은 공포감에 사로잡히며, 그녀의 표적이 된 범죄자들은 밤낮 없이 죄책감이 밀려와 미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책감을 의인화한 신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에리니에스 여신'이란 존재로 비유하긴 하였으나, 그들의 역할이 범죄자가 저지른 죄를 밝히고 그를 통해 합당한 벌을 받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현대에 활동하는 프로파일러들과 매우 흡사해보입니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의란 복수와도 닿아 있었습니다. 복수의 여신 중 하나인 네메시스(Nemesis-각주 4)가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티아(Justitia)와 비슷한 신격으로 여기거나, 여러 그림 등에서 두 신이 함께 죄지은 자들을 쫓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원한을 풀고, 범죄에 대한 합당한 벌을 내리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복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그 '복수'의 역할을 사사로이 하지 못하게 할 뿐, 국가와 법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범죄자를 잡고 적절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야 말로 현대 국가에서 반드시 수행해야할 임무이며, 사회가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는 기틀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공적인 복수자의 역할'에 일조하는 프로파일러 분들의 활약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비코스의 두루미 이야기 속에 나오는 에리니에스 여신들처럼 '범죄를 저지른 자를 반드시 찾아내서 온당한 벌을 받게 하겠다!'고 경고하는 프로파일러 박지선 교수님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모든 범죄는 태양 아래 밝게 드러나고, 죄지은 자들에게는 항상 합당한 벌이 내려지길 바랍니다.
***각주
1. 참고로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유명한 피타고라스(Pythagoras, Πυθαγόρας)도 이 섬 출신이며, 이비코스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타고라스가 본문에 언급된 폴리크라테스라는 참주 때문에 사모스 섬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 이스트미아 경연대회(Isthmian games)은 고대 그리스에서 2년 마다 열리던 운동과 예술 경연 대회로,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 지역이 고대에는 포세이돈 신의 성지였다고 하네요. 포세이돈에게 소나무 숲이 바쳐져 있어, 우승자는 '소나무관'을 받았다고 합니다.
3. 복수와 분노의 세 여신으로, 라틴어로 'Furi'라고 불리며 영단어인 'fury'의 기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세 자매의 이름은 각각 티시포네(Tisiphone 살인을 복수하는 여자), 알렉토(Alecto 끊임없는 분노), 그리고 메가이라(Megaera 질투하는 여자) 입니다.
4. 네메시스는 주로 인간의 오만과 불경에 대한 징벌을 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