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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May 18. 2021

하일, 하이드라!

헤라클레스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독.

브런치에 입성하며 제가 처음 썼던 글을 올려보고 싶어졌습니다.

제목이 좀 뜨악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뭔가 눈에 들어오게 만드는 제목을 짓고 싶었습니다.


의사로서 쓰는 글은 논문이나 질병에 대한 안내글 정도여서, '이야기'는 어떻게 써야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머릿 속에 써보고 싶은 이야기는 한가득인데, 무엇부터 써야할지 무슨 글로 시작해야할지도 잘 몰라서 읽는 분들도 어리둥절하실 것 같습니다.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글은, 신화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의사의 관점으로 읽고 해석하고, 그 해석에 대해 공유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그러한 글입니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이야기들은 그냥 '판타지'라고 생각하며 읽어도 매우 재미있지만, 현대 의학의 지식을 가지고 볼 때 어떠한 증상이나 질병을 보여주는 듯한 내용이 많고, 실제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의학 용어의 기원도 신화 속에 잔뜩 들어 있습니다.


네, 한 마디로  저 제목은 '헤라클레스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어그로 끌었다!'의 마음가짐으로 써본 것입니다. 21세기에는 '헤라클레스와 히드라'라는 것보다는 '캡틴아메리카와 하이드라'가 더 유명하니까요. 약간 지루하실지도 모르지만, 의사의 입장에서 읽어본 헤라클레스와 히드라의 이야기를 조금만 참고 읽어봐주시길 바랍니다.




하이드라(Hydra)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속에서 맹활약하는 빌런 집단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윈터 솔져'라는 영화를 보시면 특히 그들의 극악함(?)을 잘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이드라의 기원은 원래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강력한 괴물입니다. 그리스어로는 '히드라('Ύδρα)'라고 불리며, 신화 속 최고의 영웅인 헤라클레스(Hercules, Ήρακλης)와 싸우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는 캡틴아메리카보다는 덜(매우매우 덜...) 도덕적이고, 덜 정의로운 성격이지만, 헐크만큼 강력한 것이 아닐까 싶은 괴력의 소유자입니다. 

캡틴 아메리카(좌)와 헤라클레스(우)


헤라클레스는 신들의 왕인 제우스(Zeus, Ζεύς)와 미케네(Mykines)의 공주인 알크메네(Alcmene, Aλκμήνη) 사이에서 태어난 반신반인으로, 태어난 직후부터 헤라 여신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보낸 뱀들을 눌러 죽일만큼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래 그림이 그 일화를 다룬 것인데, 무서운 뱀을 장난감 다루듯이 쉽게 잡아 목을 졸라 죽이는 어린 헤라클레스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스의 어린 시절, 1676년, 베르나르디노 메이


 헤라클레스는 살아 생전 수많은 괴물들을 없앴고, 여러가지 모험에 참가하여 그리스 전역에 이름을 날렸습니다. 특히 그가 행한 12가지 노역은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영웅들의 위업에 맞먹는 대단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열두 가지 노역 중에서도 아래 그림에 나온 이야기들이 매우 유명합니다. 칼도 활도 상처 입힐 수 없는 가죽을 지닌 거대한 사자를 맨손으로 목졸라 죽인 것과 아무리 베어도 다시 살아나는 불사의 머리를 지닌 히드라(각주 1)를 제압한 일로, 헤라클레스는 그리스의 어떤 영웅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위용을 보여주었습니다.

네메아의 사자와 싸우는 헤라클레스(좌)와 히드라와 싸우는 헤라클레스(우)


특히 히드라와의 싸움은 MCU 영화인 '캡틴아메리카' 시리즈가 이걸 오마쥬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영화 속에서 하이드라 잔당들이 '우리는 머리 하나를 베면 두 개의 머리가 자라난다!'라고 외치며 아무리 싸워 이겨도 또 나타나고, S.H.I.E.L.D라는 기관까지 잠식했듯이, 아무리 죽여도 또 머리가 자라나 결국 베어낸 부분을 불로 지져 재생을 막고 불사의 머리는 큰 바위로 눌러버리는 식으로 공격해서야 겨우 싸움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항상 완벽한 승리를 이루는 헤라클레스를 가장 고전시킨 괴물이었던 것이죠. 

게다가 마블 영화 속 하이드라처럼, 히드라와의 싸움의 부산물은 큰 비극을 불러오게 됩니다. 

헤라클레스의 비참한 죽음이라는 형태의 비극을 말이죠.


 헤라클레스의 위대한 삶에 비하여, 그의 죽음의 과정은 조금 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빛나는 삶에 비하면 안타까울 정도로 비참한 결말이었습니다. 12가지의 노역이자 위업을 끝낸 헤라클레스는 다시 가정을 이루고 (각주 2) 평온을 누릴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신화 속 영웅인 멜레아그로스(Meleagros, Μελέαγρος)의 여동생, 데이아네이라(Deianeira, Δηϊάνειρα-각주 3)와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헤라클레스는 데이아네이라와 결혼하기 위해 강의 신 아켈로오스(Achelous, Ἀχέλῷος)와 결투를 벌이고 승리하였으며, 그녀를 데리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강을 건널 때, 켄타우로스 종족의 하나인 네소스의 도움을 받게 되었는데, 데이아네이라를 건네주던 네소스(Nessus, Νέσσος)가 갑자기 음심(淫心)을 품고 그녀를 납치하려 했습니다. 


그 때 강을 먼저 건넌 상태에서 그 광경을 본 헤라클레스는, 본인이 물리쳤던 괴물인 히드라(Hydra, 'Ύδρα)의 독이 묻은 화살을 날려 네소스를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네소스는 죽어가면서도 이들 부부에게 의심이 싹틀 만한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데이아네이라에게 ‘언젠간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 자신의 피가 묻은 옷을 입혀라, 그렇게 하면 남편의 마음이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하고 숨을 거둔 것이죠. 


아래 나오는 그림은 위에서 나온 이야기를 축약해서 잘 보여줍니다. 납치로 인해 놀란 데이아네이라와 성난 얼굴로 쫓아오는 헤라클레스, 그리고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서 그 피를 옷에 묻혀보라는 암시를 주는 네소스까지 말이죠.

헤라클레스, 데이아네이라, 켄타우로스 네소스, 17세기경, 노엘 쿠아펠


순진했던 데이아네이라는 네소스의 피를 일종의 사랑의 묘약인 것으로 생각하며 보관했고 얼마 후 결국 그 피를 사용하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12가지 노역을 완수한 후에, 오이칼리아(Oechalia-각주 4)의 공주인 이올레(Iole, Ἰόλη)를 얻기 위한 활쏘기 내기를 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내기에서 이겼기에 약속대로 이올레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데이아네이라의 귀에도 들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승에 따라서는 매우 잔인하게도, 데이아네이라에게 이올레와의 결혼식에 입을 예복을 준비하라고 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든 남편이 다른 여성과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데이아네이라는 이럴 때를 대비해 고이 보관 해놓았던 네소스의 피를 사용하기도 마음을 먹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가져다 달라던 옷에 네소스의 피를 묻혀서 전해준 것이었죠. 

그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는 네소스 피 속에 녹아 있던 히드라의 독에 의해 고통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살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 치던 헤라클레스는 옆에 있던 시종까지 던져버리며 발버둥을 치다가 옷을 벗으려 했으나 옷은 살갗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옷에 있는 독 때문에 천 자체가 그의 피부에 들러붙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피부와 함께 옷을 찢어버린 헤라클레스였으나 통증은 멈추지 않았고, 그 광경을 본 데이아네이라는 자신이 네소스에게 속았음을 그리고 남편을 해치게 되었음을 깨닫고 절망한 나머지 자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끔찍한 고통을 받던 헤라클레스는 죽고자 하였으나 제우스의 피를 이은 반신(半神)인데다, 태어나자 마자 헤라의 젖을 먹은 적도 있어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대로 영원히 고통만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헤라클레스는 오이타(Oita) 산 꼭대기에 올라 거대한 장작더미 위에 몸을 얹고 불을 질렀으며, 제우스에게 자신의 불사(不死) 능력을 거두어가 달라고 기원한 끝에 겨우 죽음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장작더미 위의 헤라클레스, 1617, 귀도 레니


이 이야기 속에 ‘히드라’의 독이라는 물질이 나오는데, 이 독은 그리스 신화 속에서도 굉장히 자주 언급되는 강력한 독성 물질입니다. 히드라라는 괴물이 거대한 뱀의 형상(물뱀)을 지닌 것을 고려할 때, 아주 강력한 독성을 지닌 뱀독을 상상하며 만든 이야기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보다 자연환경과의 접촉이 많았던 고대에는 뱀과 같은 야생동물에게 공격을 당해 그에 의한 중독 증상으로 사망하는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뱀의 독은 크게 신경마비를 일으키는 신경독과, 출혈을 일으키는 용혈성 독으로 나뉘는데, 독니에 물린 상처를 통해 독이 흘러 들어가게 만들어 사냥감을 중독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독을 화살에 묻혀 활용하는 것은 이해가 되나, 헤라클레스처럼 피부를 통해 스며들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마도 이 부분은 신화 속 히드라 맹독의 강력함을 강조하고, 헤라클레스의 비극적인 죽음의 과정을 이끌어내기 위한 문학적 장치일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물론 뱀독이 아닌 독성 물질 중에는 실제로 피부를 통해 스며들어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것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사용된 겨자가스(각주 5)가 있습니다. 

독일 과학자에 의해 개발된 이 독성물질은 화학탄이나 전투기에 의한 공중 살포 형태로 전장에 뿌려졌으며, 이 가스에 노출된 사람은 피부에 커다란 수포가 발생하며 전신에 3도 화상까지도 입을 수 있었습니다. 노출된 부위에 따라 눈이 멀거나 폐수종을 일으키기도 하고, 피부 병변에 대한 2차 감염으로도 사망할 수 있는 강력한 독극물이었습니다.

개스드(gassed), 1919, 존 싱어 사전트


그림의 중앙에서 눈 먼 채로 걸어가는 병사들과 및 아래쪽에 비참하게 쓰러져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겨자가스의 무서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통 받는 병사들의 모습이 장작더미 위에 올라 죽음을 애원하던 헤라클레스와 겹쳐 보이는 듯 합니다. 

이 물질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존재할 리 없는 인공 화학물질이지만, 헤라클레스의 고통스러운 사망 과정을 볼 때, 가장 그 독성과 흡수 방법이 흡사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신화 속에서 헤라클레스를 죽음으로 몰아간 뱀독은, 현대에는 일부 성분을 추출하여 기능성 화장품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소베놈(sovenom)이라는, 살무사(학명: Gloydius blomhoffii) 독의 불활성화 성분을 이용하여 피부 주름을 개선하고 미백 효과를 나타냅니다. 


독이 묻은 옷을 입고 사망한 헤라클레스가 알게 된다면 허탈한 웃음을 터뜨릴지도 모를 일이 아닐까요? 게다가 영화에 나오는 하이드라 마크까지 보게된다면 방패 들고 싸우는 캡틴 대신에 본인의 주무기인 몽둥이를 휘두르며 참전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MCU 속 하이드라의 심볼




* 각주

1. 9개의 머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불사의 머리입니다.

2. 이전에 헤라 여신의 저주로 광기에 빠져, 아내와 자식들을 짐승으로 착각하여 죽이고 말았습니다.

3. ‘남편을 다치게 한 여인’ 이란 뜻-이름부터 강력한 스포일러입니다.

4. 고대 그리스의 트라키아 지방

5. 정식명칭은 ‘설퍼 머스터드(Sulfur must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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