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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May 19. 2021

선과 악은 분리가 가능한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증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뮤지컬로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인공인 지킬 박사가 조현병(정신분열병)에 걸려 고통 받는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선과 악의 인격을 분리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하고, 그 약의 효과를 자신에게 임상 시험하다가 결국 악한 인격의 화신인 '하이드'를 만들고, 그가 저지르는 범죄들로 인해 양심을 가책을 느껴 자살에 이르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이죠.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포스터.

이 작품의 원제는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이며, 스코틀랜드의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1886년에 발표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이후 나타나는 '이중인격'을 소재로하는 작품들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예로는 마블의 히어로인 '헐크(Hulk)'가 있겠습니다. 물론 헐크는 하이드씨의 역할이면서도 나름 선한 존재이지만 말입니다.

1886년에 출판된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소설 초판본(좌)와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우)


제목에 들어있는 'Case'라는 단어는 '범죄 사건'이라는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만, 의학계에서는 환자의 질병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증례'라는 표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스릴러나 공포물의 관점으로 보면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인격 분리로 인한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의사의 관점으로 보자면 '인격의 해리'라는 정신병적 증상을 겪는 환자의 경과 기록이기도 합니다.


지킬 앤 하이드의 줄거리를 살펴 보다보면, 과연 이 지킬 박사라는 사람이 경험한 사건이 과연 무엇인지, 의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들게 됩니다.

몇 가지 의문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1) 지킬 박사는 진짜로 인격을 분리하는 약을 만든 것인가?

소설의 내용을 보면 지킬 박사는 '선과 악을 양분하는 약'을 만들었으며, 나중에 하이드를 다시 없애기 위한 약을 만들려고 할 때, 재현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처음 만들었던 약의 재료에는 '정확한 성분을 알수 없는 불순물'이 섞여 있었으나, 새롭게 공급 받은 재료에는 오히려 그 불순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확히 알 수 없는 성분으로, 우연히 만들어낸 약만이 진짜 효력이 있었다는 표현을 쓴 것을 볼 때, 과학이라기 보다는 연금술에 가까운 얘기이지만 어쨌든 처음 한 번만은 진정한 '인격분리제'를 만들어냈던 것도 같습니다.

물론 현대 의학에서도 '선과 악'을 완벽히 분리하는 약제라는 것은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실제적으로 인격이란 것이 칼로 무를 자르듯 양극단으로 나뉠 수도 없는 것이긴 합니다. 다양한 지식과 경험, 유전적 성향, 환경 요인들이 섞여서 형성되는 것이 바로 인격이니까요.


(2) 혹시 지킬 박사가 만든 약이 일종의 정신병적 증상을 일으키는 약은 아니었을까?

호밀에 자낭균이 기생하여 맥각 알칼로이드라는 성분을 만들어 냅니다(좌). LSD는 환각을 일으킬 수 있는 마약입니다(우).

작가인 스티븐슨이 이 작품을 쓸 때, 환각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약제인 '맥각(Ergot)'을 복용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진짜라면, 작가는 약물에 의해 유발되는 정신병적 증상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것이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약물에 의해 다른 인격이 발생하는 이야기를 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약물에 의해 환각 증상이 나타나고 고양감이 생기며 판단력이 저하되는 상태를 '또 다른 자신'이 탄생하는 것으로 느꼈을 수도 있으니까요.

여러 종류의 마약류 약물이 이와 같은 상태를 초래할 수 있으며, 지킬 박사도 우연히 그와 같은 성분을 제조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약 성분에 의해 취한 상태를 '악한 인격'이 깨어난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으며, 그 악에 매료되는 것은 바로 마약 중독 증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죠.

점점 '하이드'가 되는 것에 탐닉하고 본래 인격이 붕괴되어가는 과정이 마약 중독을 비유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3) 오히려 지킬 박사가 만들었던 약제 중 '반작용제'는, 정신병적 증상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지킬 박사에게 조현병의 가족력이 있고(아버지), 실제 가족력이 있는 경우에는 조현병의 발병 가능성이 좀 더 높아지게 됩니다. 아버지의 상태를 보며 조현병 치료에 고심한 끝에 증상을 조절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한 것인데, 그 즈음에 본인이 조현병 증상이 발생하여 자신이 만든 약이 인격을 분리하는 약제라는 망상에 빠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하이드씨의 인격이라는 것은 조현병의 양성 증상(Positive symptoms)인 망상과 환각에 시달리는 상태이고, 중간중간 반작용제라고 믿으며 주사한 것이 '항정신병약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마다 잠시 지킬이라고 하는 발병 전 상태로 돌아왔다가 어느 순간 병이 악화되어 제대로 된 약제를 만들어 내는 것에 실패하고 본인의 증상이 통제가 되지 않는 것에 절망하여 자살에 이른 것은 아닐까요?


(4) 지킬 박사가 만들어낸 약의 성분 자체는 아무 의미 없는 위약(Placebo)였으나, 인격의 분리가 가능하다는 일종의 자기암시가 걸린 것은 아니었을까?

디콘 브로디(좌)와 그의 이름을 붙여 만든, 에딘버러에 있는 브로디스 클로스(우).

또 다른 가설은 작가인 스티븐슨이 소설 소재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건에서 착안하였습니다. 

이 소설을 쓸 때 '디콘 브로디'라고 하는 범죄자의 이야기를 참고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 사람은 낮에는 가구를 만들거나 길드의 업무를 보고 시의원의 업무를 수행하는 등 매우 성실하게 살다가 밤이 되면 낮에 얻은 정보를 토대로 가택침입강도 범죄를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도박을 하거나 유흥에 소비했다고 하죠.

스티븐슨이 보기에 이렇게 완벽한 이중생활을 하는 범죄자의 모습은, 선한 인격의 지킬과 악한 인격의 하이드로 나뉜 상태와 비슷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지킬 박사 역시 일종의 악한 충동이 자신 안에 내재해 있는데, 자신의 만들어낸 약(실제로는 효능이 없는)에 의해 악한 인격이 깨어나서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스스로 믿게되었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범죄자들 특유의 자기합리화라고 볼 수 있죠.  


(5) 지킬 박사가 겪는 증상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였을까?

정신의학적으로 보자면, 지킬과 하이드의 이중인격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란, 한 명의 사람의 안에 둘 이상의 '각기 다른 정체감을 지닌 인격'이 존재하여 실제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질환을 의미합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어린 시절의 심한 트라우마에 의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원래의 자아와 완전히 다른 성격과 특성을 지닌 인격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킬 박사의 경우는 어린 시절 조현병에 걸린 아버지를 보며 나름의 트라우마를 겪었을 수도 있으며, 평소의 자신과는 180도 다른 자아인 하이드가 나타났다는 것을 볼 때 이 질환과 비슷해보입니다.

실제로는 매우 드물고 진단이 쉽지 않은 질환이므로, 지킬 박사의 경우도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지속적인 정신건강의학과 진료가 필요할 것입니다. 

게다가 진짜로 약물에 의해 인격이 분리된 경우라면 이 질환의 진단 기준에는 맞지 않게 되죠. 



여기까지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의 기록을 토대로 제 나름대로 의학적인 분석을 시도해본 내용입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가상의 증례'에 대한 저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정확한 결론은 제가 소설 안에 들어가지 않는 한 영원히 낼 수가 없겠죠.


물론 실제 지킬 박사가 겪었던 일이 무엇이었던 간에,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날 묶어 왔던 사슬을 벗어 던진다'라는 뮤지컬 노래 가사의 감동은 바래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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