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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Feb 10. 2022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경과 질환

첫번째 이야기 - 뇌혈관 질환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의학 이야기들을 좀 더 다뤄보고 싶어서, 아직 책에 쓰지 않은 내용들을 살펴보던 중, 제 전공인 '신경과'에 집중한 이야기들을 다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경과(Neurology)에서 다루는 여러가지 질환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것은 뇌졸중, 뇌경색(cerebral infarction) 등으로 불리우는 '뇌혈관 질환(cerebrovascular disease)'일 것입니다.



뇌혈관 질환은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흡연 등의 다양한 위험 요소 등에 의해 발병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손상이 일어나는 혈관 부위에 따라 다양한 신경학적 이상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측 뇌반구에 발생한 뇌경색, CT 사진. 이 경우 신체에서는 좌측에 증상이 발생합니다. 출처-위키피디아.


뇌혈관 질환을 겪는 환자들은 뇌의 손상 부위와 손상 정도에 따라 팔/다리 마비, 구음 장애(발음이 부정확해지는 증상), 언어장애(원하는 대로 말하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말을 이해 못하는 등의 언어 기능의 이상), 감각 장애, 어지럼증, 보행 장애, 시야 장애, 그리고 인지 기능 장애 등의 다양한 증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변이 광범위하거나 치료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에는 의식 저하, 혼수 상태, 그리고 사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뇌혈관 질환은 고대 사람들도 관찰한 경험이 있었는지, 크레타 섬에서 번성했던 '미노아 문명'의 유물을 살펴본 결과, 위의 CT 사진과 같은 우측 뇌의 경색을 경험한 것으로 의심되는 환자를 묘사한 토우(흙으로 빚어만든 인형)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

그 토우는 우측 뇌반구의 경색이 발생하였다가 회복한 환자를 묘사한 것인지, 좌측 얼굴의 마비와 좌측 팔의 구축(특정 자세로 굳어 펴지지 않는)이 나타난 상태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각주 1).

-아쉽게도 이 토우의 사진은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크레타 사람들은 이와 같은 뇌경색 증상을 겪은 환자들의 치유를 'Gazi'라는 이름의 여신에게 기원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여신은 양귀비(Poppy)의 여신으로도 불리웠고, 양귀비에서 추출할 수 있는 마약성 성분으로 인해 잠과 죽음의 여신, 약의 여신으로도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The Goddess of Gazi. Archaeological Museum of Heraklion (1400-1100 B.C.).

실제로 뇌경색 환자에게 마약 성분의 약을 투여하는 치료는 의미가 없겠으나, 고대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약 성분의 한계와, 잠과 죽음을 주관한다는 상징성 등으로 인해 'Gazi' 여신에게 병의 치유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미노아 문명 시대로부터 긴 시간이 흘러 히포크라테스가 살던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뇌에 피를 공급하는 혈관'에 대한 존재가 어느 정도 인식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에 대한 증거로 경동맥(혹은 목동맥)의 영어 단어인 'carotid artery'의 어원이, '멍해지다', '마비시키다' 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인 'karos (κάρος)'에서 나왔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경동맥에 대한 해부학적 묘사. 출처-위키피디아.

경동맥은 대동맥에서 나온 총경동맥(Common carotid artery)에서 시작되어 뇌로 혈액을 공급하는 내경동맥(internal carotid artery)과 얼굴, 두피, 뇌막 등에 혈액을 공급하는 외경동맥(External carotid artery)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고대 사람들은 전투 등을 위해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경동맥의 주행 부위가 눌리는 상황이 발생하면, 혈관이 눌린 사람의 의식이 흐려지거나 혹은 마비를 경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신들이 누르는 부위에 위치하고 있는 혈관에 'Karos'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 같습니다.



참고로 마비되는 것을 뜻하는 영단어인 'Stupefy'는 유명 판타지 소설인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상대방을 기절시키는 능력을 지닌 마법의 주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스투페파이 주문을 사용하는 헤르미온느(해리 포터 주연 3인방 중 한 명).


이러한 경동맥에 의한 기절 증상을 묘사한 부조를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각주 2).

파르테논 신전의 남쪽 면에서 볼 수 있는 부조, 라피타이 족과 켄타우로스 간의 싸움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노란색 원 안에는 경동맥을 누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위 부조에서 묘사된 싸움은 '켄타우로마키아(켄타우로스족과의 싸움이라는 뜻)'의 장면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라피타이 족의 왕인 페이리토스와 히포다메이아(말을 잘 다루는 여성이라는 의미의 이름인데, 향후의 사태를 나름 예견한 작명 같기도 합니다)의 결혼식에 반인반마인 켄타우로스들이 초대되었었는데, 이들은 난폭한 성정을 지닌 자들 답게 술에 취하자 결혼식에서 난동을 피우며 신부인 히포다메이아를 강간하려고 하였습니다(라피타이족과는 원래 친족이어서 초대된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에 격분한 라피타이 족들은 켄타우로스들과 전투를 벌였고, 이 결혼식에 참가했던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와 함께 켄타우로스 족들을 격퇴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결과적으로는 라피타이 족의 승리였지만, 부조 안에서는 켄타우로스와 라피타이 간의 치열하고 극적인 몸싸움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결혼식 중 벌어진 상황이라 병장기가 충분히 마련되지 않아 육탄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을테고,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인 경동맥 압박을 가하는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행하던 싸움의 방식을 신화 속 장면을 빌려 부조 안에 남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뇌혈관 질환에 대한 또 다른 묘사는 트로이 전쟁 이야기인 '일리아스' 속에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습니다.

첫 번째 뇌혈관 질환은 그리스 진영이자 최강의 전투력을 지닌 영웅인 '아킬레우스'와 트로이 측의 용사인 '아이네이아스(후에 로마의 전신인 라비니움을 세우는)'와의 싸움 속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아킬레우스와 아이네이아스가 싸우게 되었을 때, 당연히 아킬레우스가 우세하여 아이네이아스는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네이아스는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아들이기도 하여, 자신의 아들이 죽는 것을 볼 수 없었던 아프로디테가,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에게 부탁하여 아이네이아스를 구출하게 됩니다. 

아킬레우스와의 전투 중 수세에 몰린 아이네이아스를 구출하는 포세이돈.

이 과정에서 포세이돈의 힘에 의해 아킬레우스는 일시적으로 '눈 앞이 어두워지는 상태(시력을 잃는)'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 증상이 현대 의학적으로 보면 'Amaurosis Fugax'로 추측이 됩니다.



Amaurosis fugax는 낯선 용어지만, 어둠을 의미하는 amaurosis와 '휙 지나간다'는 것을 뜻하는 fugax를 합하여 만든 것으로, 증상을 아주 적절히 묘사한 것이기도 합니다. 일시적으로 한쪽 혹은 양쪽 눈의 시력이 사라져서 앞이 어두워지는 것을 적절하게 표현해주고 있으니까요.

Amaurosis fugax에 의해 발생하는 시야 장애를 묘사하는 그림(각주 3).

이 증상이 발생하는 원인은 다양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뇌혈관 질환에 의해 발생할 수 있으며, 내경동맥이나 안동맥(눈동맥, ophthalmic artery)가 혈전에 의해 막히거나 동맥 경화로 좁아지거나, 또는 갑자기 수축하는 경우에 혈류가 줄어들어 위의 그림과 같이 시야가 어두워지는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일리아스 속 또 하나의 뇌혈관 질환 케이스는 '디오메데스'라고 하는 그리스 측의 강력한 무인이 겪은 일입니다.

아르고스의 왕이자 트로이 전쟁 중의 영웅 중 한 명인 디오메데스.

일리아스 속 묘사에 따르면, 디오메데스는 전투 중에 어깨에 창상을 입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많은 피를 흘려 눈 앞이 안개가 낀 듯이 흐려지는 증상을 겪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다행히 그를 아끼던 지혜와 승리의 여신 아테나에 의해 그 '안개'가 금방 걷혀졌다고는 하지만, 어깨 부위 부상으로 인한 출혈 후 그가 겪은 시야 장애는 아킬레우스가 겪은 종류와 비슷한 계통의 뇌혈관 질환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깨에 창상을 입고 상당히 많은 양의 피를 흘렸다면, 일시적으로 뇌로 가는 혈류가 감소했을 수 있고, 그에 따라 아킬레우스와 비슷하게 시야 장애를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어깨를 관통하는 창상이 발생한다면 잠시 시야가 흐려지는 정도가 아니라 통증과 출혈로 인해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디오메데스의 경우에는 '영웅'이라는 특수성과 여신의 가호로 인해 증상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다시 싸움을 속행하는 위엄을 보여주게 됩니다.




신화 속에서는 현대의 우리들이 주로 경험하는 양상의 '뇌경색'을 앓는 환자들의 이야기가 등장하진 않지만, 뇌혈관의 기능과 혈류의 장애가 발생했을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증상들에 대한 묘사가 조금씩은 엿보여 상당히 흥미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주
1. Facial palsy depicted in archaic Greek art on Crete. Pirsig, Helidonis, & Velegrakis, 1995.
2. History of Carotid Stroke, AB Munster, 2016.
3. Transient Monocular Visual Loss Patterns and Associated Vascular Abnormalities.Bruno et al., 1990, Stroke
4. Greek mythology: The eye, ophthalmology, eye disease, and blindness. Trompoukis & Kourkoutas,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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