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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Feb 22. 2022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경과 질환

두번째 이야기 - 뇌전증

오늘은 저의 책인 [의사가 읽어주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언급된 바가 있으나, 온라인에는 올려본 적 없는 '뇌전증(Epilepsy)'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질환 자체에 대한 의학적 설명은 책의 내용과 어느 정도 겹치지만, 신화에 관련된 부분은 책을 보셨던 분들도 지루하지 않도록 새로운 내용들을 담아보았습니다.




뇌전증(腦電症, Epilepsy)은 가장 흔한 신경 질환 중 하나입니다.


얼핏 이 이름만 들어서는 대체 무슨 병일까 싶은 분들도 많겠으나, 예전에 사용되었던 간질이라는 명칭을 들으시면 조금은 익숙하게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간질이라는 병명이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이 있어, 의료계에서는 2010년부터 '뇌전증'이란 이름을 사용해왔으며, 2014년부터는 보건당국에서도 간질이라는 병명을 폐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뇌전증이 공식용어이며, 밴드를 찾아주시는 분들께서도 간질이라는 단어 대신 이 용어를 사용해주시면 좋겠습니다(각주 1).

대한뇌전증학회의 로고.


이 질환은 매우 흔한 신경계 질환이라고 앞서 말씀을 드렸는데, 어느 정도로 흔한가 하면 전세계적으로 대략 4천만명의 사람들이 이 질환으로 진단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대 의학에서는 뇌파(Electroencephalography, EEG)를 비롯한 다양한 의학 검사 방법에 의해 뇌전증이 뇌신경세포의 일시적이거나 드물게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불규칙적인 이상흥분현상 및 이상동기화 현상에 의하여 의식 저하나 발작(Seizure)과 같은 증상이 발생하게 되는 질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신’이나 ‘악령’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했던 질병입니다.

뇌전증은 고대부터 관찰되었고, 환자 및 그 현상을 관찰하고 마주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공포를 갖도록 하는 신비한 질환이었습니다.
수많은 구전, 문헌, 그리고 그림이나 조각상과 같은 다양한 예술 작품 속에 뇌전증을 묘사하는 기술과 형상들이 녹아 있습니다.

성 세베린이 뇌전증(falling sickness)을 앓는 젊은 여성에게서 '악마'를 쫓아내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1300년 경 작품.


그러나 앞서 언급했던 뇌파를 측정하는 기술이 발명되기 전(최초의 인간 뇌파는 1929년 독일 과학자Hans Berger에 의해 측정되었습니다)까지는 이 질환의 원인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지성과 호기심을 지닌 인류는 무지한 상태를 해결하고 싶어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었기에 뇌전증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들을 고민했으며, 가장 그럴 듯한 병리 기전으로 생각한 것 중에 하나가 ‘신’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뇌전증의 영어 명칭인 ‘Epilepsy’의 기원도, ‘사로잡히다’라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인 ‘Epilambanein(ἐπιλαμβάνειν)’이며, 많은 사람들에 의해 신성한 병(sacred disease)이라고도 생각되었습니다.

뇌전증 환자의 뇌파 소견 (출처-위키피디아). 스파이크(spike) 혹은 극파라고 부르는 뾰족한 파형과 웨이브(wave) 혹은 서파라고 부르는 느린 물결 모양의 파형이 관찰됨.


현대에는 환자가 뇌전증이 의심될 경우에는 위와 같이 뇌파 검사를 시행하고, 이와 함께 발작을 유발하는 뇌전증 외의 다른 원인이 없는지 감별하기 위한 다양한 검사(혈액 검사, 약물 복용 여부 확인, 뇌영상 검사 등)를 시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뇌전증이 진단된 환자에게는 항뇌전증제(Antiepileptic drug, AED)를 사용하는 치료을 우선적으로 시행하게 되며, 이 외에도 환자의 특성에 따라 수술 치료, 미주신경자극술(vagus nerve stimulation, VNS), 의료용 대마 사용(Cannabidiol, CBD), 케톤 식이 요법 등을 고려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뇌전증이 의심되는 증례가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도 등장합니다.

이전 글에서도 주인공으로 활약한 바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 속 최고이자 최강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광기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이야기 입니다.

네메아의 사자와 싸우는 헤라클레스. 폴 루벤스의 작품.


헤라클레스는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와 티린스(Tiryns) 왕국의 왕비인 알크메네(Alcmene, 라틴어로는 Alcumena이며 뜻은 '강한 분노'인데... 뒷일의 복선 같기도 한 이름입니다)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의 존재이며, 태어난 순간부터 비범한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헤라 여신이 남편의 바람기에 분노한 나머지, 불륜의 증거인 헤라클레스(이름의 뜻은 "헤라의 영광"임에도 불구하고)를 죽이기 위해 요람으로 보낸 뱀들을 모조리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로 목졸라 죽일 정도였으니까요.

뱀을 목졸라 죽이는 아기 헤라클레스. 1788년, 조슈아 레이놀드 작품.


태어나자마자부터 신들의 여왕이자 가정과 결혼의 수호신인 헤라 여신의 미움을 산 헤라클레스의 삶은, 영웅으로서는 위대하면서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비참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삶을 비극으로 시초가 된 사건은 그의 첫 결혼 및 가정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는 테베의 왕 크레온의 딸인 '메가라'와 처음으로 혼인을 하게 되는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두 명을 얻고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의 행복한 삶을 두고 볼 수 없었던 헤라 여신은 헤라클레스에게 '광기'를 불어넣었고, 광기에 사로잡힌 헤라클레스는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고 난폭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헤라클레스(중앙)가 자신의 어린 아들을 죽이는 동안, 겁에 질려 벽에 기대어 있는 메가라(오른쪽). 기원 전 350년 경의 작품.


이 광기로 인해, 그는 가족들이 괴물로 보이는 환각에 빠져 어린 아들들을 활에 화살 대신 장전하여 쏘아버리거나 몽둥이를 휘두르듯 던져서 죽이는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아내인 메가라 역시도 이 소동 중에 죽였다고 합니다(혹은 부인만은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피를 묻힌 후, 뒤늦게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한 짓을 깨달은 헤라클레스는 커다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죄를 씻는 방법을 아폴론 신을 모시는 '델포이 신전'에 물어보았고, 델포이 신전의 신탁에 따라 그 유명한 열두 가지 노역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열두 가지 노역 중 하나인 '케리네이아의 거대한 암사슴을 생포하기. 540–30 BC 경에 만들어진 작품.


헤라클레스가 겪었던 광기는 신화적으로는 '여신의 저주'라고 설명되고 있지만, 의학적으로 해석해보자면 '발작 후 정신병적 증상(Postictal Psychosis)'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신화 속 헤라클레스는 갑자기 광기에 사로잡혔다가, 난폭한 행동이 끝난 후에 다시 명료한 의식을 되찾게 됩니다. 그러나 광기에 사로잡히기 전까지 완전히 의식을 잃었거나 팔다리가 뻣뻣해지거나 떨리는 증상이 나타났다는 묘사(보통 생각하는 뇌전증 환자가 겪을 수 있는 대발작 증상)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는 저의 추측이지만, 고대 사람들이 '갑자기 광기에 들렸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 증상이 발생하기 직전 헤라클레스가 잠시 멍하거나 혼자 중얼거리는 증상이 선행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러한 멍한 증상 등이 나타나는 뇌전증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이 측두엽 뇌전증(Temporal lobe epilepsy, TLE)인데, 헤라클레스는 이 측두엽 뇌전능에 의한 복합부분발작(Complex partial seizure, CPS)이 일어났다가 갑자기 공격성, 폭력적인 행동, 혹은 환각 등을 경험하는 '발작 후 정신병적 증상'을 겪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각주 2)?

물론 헤라클레스는 이 사건 이후로는 이 정도의 광기에 사로잡히거나 뇌전증을 의심할만한 증상을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가 상상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여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본다면, 고대에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광기에 사로잡혔다가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그들의 상태를 신화적 상상과 결합하여 '헤라클레스의 비극적인 일화'를 만들어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화 속 헤라클레스가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와 같은 증상을 겪었을 때, 고대에는 막연히 '신의 저주'라고 생각하며 안타까워하거나 신전에 기도를 올리는 등의 행위로 치유 혹은 속죄를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는 갑작스런 이상 행동 역시 다른 의학적인 원인이 없는지 감별 진단을 시행하고, 뇌전증과 같은 원인이 발견된다면 이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열두 가지 노역 대신, 누구나 할 수 있는 병원을 방문하고 의사를 만나는, 훨씬 더 안전하고 편안한 방법으로 말이죠.





<각주>

1.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7022410?sid=102

2. Devinsky O. Postictal psychosis: common, dangerous, and treatable. Epilepsy Curr. 2008 Mar;8(2):31-4.

*** 이 글은 뇌전증 환자들과 그 분들이 겪을 수 있는 증상들이 반드시 정신병적 증상이나 난폭함을 동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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