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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Mar 04. 2022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신경과 질환

세번째 이야기 – 델포이 신전의 무녀, 피티아의 예언

어느 새 겨울도 다 지나가고 봄의 시작인 3월이 되었습니다.

아직 COVID-19로 인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밴드를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희망찬 새봄을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지난 번 ‘헤라클레스의 광기 혹은 뇌전증 이야기'와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뇌전증과 같은 ‘질병(Disease)까지는 아니지만, 신경과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증상(Symptom)’ 중 하나인 발작(seizure)에 대한 이야기이고, 헤라클레스에게 ‘가족 살해의 죄’를 속죄할 방법을 알려준 델포이 신전의 무녀, 피티아(Pythia)에 대한 전설이 나오기 때문이죠.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델포이 신전의 신탁’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델포이 신전은 태양(의술, 예술, 사냥, 예언 등등)의 신인 ‘아폴론’에게 바쳐진 신전이며, 신전에 있는 고위 무녀(혹은 여성 성직자)인 피티아가 내리는 예언인 ‘신탁’으로 매우 유명했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의 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그와 관계 있는 사람들은 사건의 원인이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이 델포이 신전에 방문했으니까요.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기 위해, 신전에 바칠 희생물을 데리고 가는 행렬.Claude Lorrain의 작품.


델포이 신전에서 나온 신탁은 워낙 많으며, 신화 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도 언급되는 예언들이 있습니다.


신화 속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관련된 것으로, 테베의 왕이자 오이디푸스의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이 델포이 신전에서 들은 예언입니다.


“이 아이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다!”


이와 같은 예언을 들은 라이오스 왕은 깜짝 놀라 갓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양치기에게 넘겨주며 죽이라고 명령했으나, 이후에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오이디푸스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지혜롭고 건장한 청년으로 장성했습니다. 결국엔 예언대로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을 죽이고 어머니인 이오카스테 왕비와 결혼하여 테베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최후에는 자신의 패륜에 대한 비밀을 모두 알게되어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는 자결하고, 절망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의 눈을 뽑아 장님이 된 후에 세상을 헤매어 다니게 됩니다.

눈 먼 오이디푸스와 그를 보살피는 딸 안티고네.


실제 역사 속에 등장하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으로는, 그리스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를 때 받았던, “나무로 된 방벽만이 점령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이 예언에 따라 나무로 만든 방벽인 배를 만들어 올라탔으며, 이는 결국 ‘바다 위에서 페르시아 군과 싸워 승리’했던 아테네의 역사와 이어집니다.



이렇게 영험한(?) 예언으로 유명한 델포이 신전에서 신의 말씀이라 할 수 있는 ‘신탁’을 전하는 존재가 바로 무녀 ‘피티아’였습니다.


델포이 신전에서 예언을 하는 무녀의 이름이 ‘피티아’인 까닭은 델포이의 원래 이름인 피토(Pytho, 혹은 피톤-Python)를 기원으로 하기 때문이라 전해집니다.


이 섬에는 원래 피톤이라는 거대한 독사(도마뱀이나 용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가 살고 있었는데, 이 괴물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자손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피톤은 이 섬에서 대지의 중심을 상징하는 돌인 옴팔로스(Omphalos, 배꼽이라는 의미)를 지키고 있었습니다(각주 1). 이런 전설로 인해 고대 그리스에서는 델포이 섬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어졌다고 합니다.

델포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옴팔로스.


어쨌든 이 돌을 지키고 있던 피톤이 아폴론과 싸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전승이 있는데, 아폴론이 태어날 때 제우스의 혼외 자식의 탄생이 싫었던 헤라가 피톤을 보내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남매의 출산을 방해했기에 그 원한으로 사냥하게 되었다는 설과, 피톤이 원래 지니고 있던 예언 능력을 뺏기 위해 죽인 것이라는 이야기 등이 전해집니다.


아폴론은 피톤을 죽이고 섬을 차지하게 되었고, 섬의 이름을 델포이로 바꾸게 됩니다(이 역시도 델포이는 피톤의 짝인 암컷 뱀의 이름인 ‘델피네’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피톤을 죽인 아폴론. 1581년 작품.


아폴론은 섬의 이름은 바꾸었으나 자신의 승리를 기념하고 싶어서였는지, 신탁을 받아 예언을 말하는 무녀의 이름을 피티아로 정하고, 델포이 섬의 신전에서 피톤에 대한 승리를 재현하는 ‘피티아 제전’을 4년에 한 번씩 열도록 하였습니다.




돌고돌아 이제서야 오늘의 본론인 피티아의 예언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티아는 델포이 신전 중심부에 있는 삼각대(삼발이 형태의 의자) 위에 앉아 신탁을 전했다고 하는데, 그 삼각대가 놓인 지점에는 큰 균열이 있고, 그 균열 사이로 신비한 증기가 올라왔다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그 증기를 마시면 아폴론의 신성과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피티아는 그 증기를 들이마신 후 일종의 최면 상태(트랜스 상태)에 빠진 채로 여러가지 신비로운 말들을 내뱉었다고 전해집니다.

델포이 신전의 피티아. 1891년, 존 콜리어의 작품.


고대 그리스의 작가인 플루타르코스(46~119AD)에 따르면, 피티아는 신탁을 전할 때 신탁을 구하는 자들의 물음을 듣고 제법 이성적으로 잘 대답하나 평소와는 말하는 형태가 달라졌으며 신탁이 끝난 이후에 자신이 얘기한 내용들을 기억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또한 손발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팔다리를 통제 못하거나 큰 신음소리를 내고 비틀거리기도 했다고 합니다(각주 2).


이러한 피티아의 모습은 고대의 신화적 관점으로 보면 신과의 소통으로 인한 영적인 모습이겠으나, 현대 의학적으로 보면 ‘신전 바닥에서 올라오는 증기에 들어있는 어떤 성분에 의해 발생한 환각과 발작 증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 학자들은 델포이 신전에서만 일어나는(사실 신화 속의 다른 예언자들은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도 예언을 잘 했으니까요), 피티아가 내려주는 신탁의 신비를 풀기 위해 가설을 세우고 연구를 진행해보았으며, 신전 바닥의 바위틈에서 올라오는 그 증기의 성분이 에틸렌 가스, 메탄 가스, 이산화탄소 혹은 황화수소일 것이라는 다양한 의견들이 거론되었습니다(각주 3, 4, 5).


이러한 의견들 중에서 현재 가장 가능성이 높은 ‘피티아 신탁의 근원’은, ‘에틸렌 가스 흡입에 의한 신경 독성 증상’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각주 6).

2001년에 델포이 신전 유적 근처에 있는 케르나 샘의 물을 가지고 성분 분석을 해보니 에틸렌이 검출되었고, 현재에는 비교적 농도가 옅은 편이나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가스를 들이마시던 피티아에게 환각과 발작을 일으킬 만큼 농도가 높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각주 7).

플루타르코스가 묘사했던 신탁 중의 피티아의 모습은 실제 고농도의 에틸렌 가스에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도 흡사합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피티아라는 이름의 어원이 델포이 섬의 원래 이름이었던 ‘Pytho’인데, 이 단어는 ‘πύθειν (púthein)’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며 이것은 “썩다.”, “부패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델포이 섬에 이러한 이름이 붙은 이유는 아폴론에게 살해당한 피톤의 사체가 부패하면서 나는 냄새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각주 8). 

이 냄새는 유기물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할 때 나는 향인 ‘Sickly sweet smell’이라고 묘사되어 있는데, 에틸렌 가스에 의해서도 이와 비슷한 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현대에 남아 있는 델포이 신전의 유적.


어찌 보면 델포이 신전을 짓기 전에 바위 틈에서 올라오는 증기의 이상한 향을 맡은 사람들이, 이 섬에서는 거대한 괴물이 죽어서 그 사체가 썩는 냄새가 올라오는 것이라는 전설을 만들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그 증기를 들이마신 사람들이 환각 상태에 빠져 ‘예언처럼 해석되는’ 신기한 소리를 하거나, 의식을 잃고 이상행동을 하고, 게다가 그러한 일련의 사건을 경험한 후에 그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이 모든 상황이 ‘신의 힘에 의해 일어나는 신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정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에 의해 ‘델포이의 신탁’이 발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 보자면, 델포이 신전에서 올라온 가스에 취한 무녀의 이야기를 ‘여러가지 간절한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 나름대로 해석’하여 신이 내린 해답으로 생각한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반복적으로 델포이 신전의 증기에 노출되었던 피티아들이 무녀로서의 수명이 짧았다고 전해지는 것을 보면(각주 9), 에틸렌 가스 흡입으로 인해 발생한 여러가지 신경 독성이 그녀들을 은퇴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델포이의 신탁을 받는 리쿠르고스(스파르타의 정치가).


신화의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신탁의 신비로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신탁이 에틸렌 가스 흡입으로 발생한 증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쇠퇴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느껴집니다.

더 이상 피티아들이 그 증기를 마실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각주 1>

1.     Voegelin E. (2000). Order and History, Volume 2. University of Missouri Press. p. 31.

-이 곳이 세상의 중심으로 정해지게 이유에 대한 전설도 있는데, 제우스가 자신의 신조인 독수리 두 마리를 세상의 양 끝에서 반대 방향을 향해 같은 속도와 높이로 날아가도록 했고, 이 두 마리 독수리가 교차하게 된 지점이 바로 델포이 섬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심을 표시하기 위해 ‘옴팔로스’라는 이름의 돌을 놔두었고 피톤은 이 돌을 지키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도 전해집니다.

‘Omphalos’라는 단어는 현대에도 ‘Omphalitis(신생아에게 발생할 수 있는 배꼽 주위 염증)’와 같은 의학용어 속에 남아 있습니다.

2.     Interview with John R. Hale on the Delphic Oracle, ABC News, Australia – (Retrieved on 2006-04-20)

3.     Lehoux, 2007 The delphic oracle and the ethylene-intoxication hypothesis.

4.     Piccardi et al., 2008.

5.     Mason, Betsy. The Prophet of Gases in ScienceNow Daily News 2 October 2006.

6.     J Toxicol Clin Toxicol. 2002;40(2):189-96. doi: 10.1081/clt-120004410. The Delphic oracle: a multidisciplinary defense of the gaseous vent theory. Henry A Spiller, John R Hale, Jelle Z De Boer

7.     Broad (2007), p. 198. 에틸렌 외에 메탄과 에탄도 검출되었다고 하나, 에틸렌 가스의 환각 효과가 가장 강력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8.     Homeric Hymn to Apallo 363–369.

9.     "Plutarch • On the Failure of Ora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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