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여신, 레테의 이름이 담긴 “기면성 뇌염"
어느 새 2022년도 1/4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벚꽃이 가득한 4월을 맞이하였습니다. 즐거운 봄날을 맞이하시길 바라며, 신경과 질환과 그리스로마 신화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소개해드려봅니다^^.
뇌염(腦炎, Encephalitis)이란 질병 이름은 여러분들도 이미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특히 여름-가을에 걸쳐서 발생하는 일본 뇌염과 같은 바이러스성 뇌염에 대해서는 뉴스 등을 통해서도 그 정보를 많이 접할 수 있으며, 감염의 매개체가 되는 모기에 물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뇌염은 일본 뇌염과 같은 바이러스에 일어나는 종류도 있으며, 이 외에도 박테리아나 곰팡이 등에서도 발생할 수 있으며, 자가면역반응에 의해 일어나는 뇌염도 있습니다.
뇌염은 이름에 걸맞게 ‘뇌의 실질’을 침범하는 염증성 질환이기 때문에 두통, 발열, 오한, 구토와 같은 뇌수막염(뇌를 둘러싼 막에 염증이 발생하는 질환)에서도 관찰되는 증상 뿐만 아니라, 의식 저하, 혼미, 시력 저하, 성격 변화, 경련 등의 중추신경계 침범을 시사하는 증상 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뇌염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병원에 방문하여 신경학적 진찰을 받고, 다른 질환과의 감별을 위해 뇌에 대한 CT, MRI 검사 및 염증 상태와 원인 균주(혹은 바이러스) 감별을 위한 뇌척수액 검사를 시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뇌염이 진단될 경우에는 입원하여 원인과 증상 심각도에 따라 적절한 치료를 받아야합니다. 뇌염의 예후는 적절한 치료로 잘 회복되는 경우도 있으나, 원인이 불명확하거나 치료 시기를 놓친 경우, 그리고 치료에 대한 반응도가 낮고 진행이 빠른 뇌염인 경우에는 환자가 사망에 이르거나 심각한 신경학적 후유증(마비, 기억력 소실, 인지기능 저하, 시력이나 청력 저하 등)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신경과적으로 상당히 중증 질환이라 할 수 있는 뇌염 중에 ‘기면성 뇌염(嗜眠性 腦炎, Encephalitis lethargica)’이라는 질병이 있습니다. 이 질환은 한문과 영문 이름에서 어느 정도 증상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기면]과 [Lethargy]이라는 표현에 맞게 ‘과도한 졸림 증상(Extraordinary sleepiness)’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각주 1).
이 질환은 1890년대에 처음 의사들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는 “post-influenzal hysteria (한글로 번역하자면, ‘인플루엔자 감염 후 발생한 히스테리증’)”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 질환에 대한 개념을 가장 먼저 정립한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신경해부학자인 ‘콘스탄틴 폰 에코노모(Constantin von Economo)’였습니다.
에코노모는 1917년에 처음으로 기면성 뇌염의 급성 증례를 보고하였으며, 이 질환의 증상으로 두통, 발열, 안구 운동 마비 및 위에서 언급했던 과도한 졸림(기면)을 강조하였습니다.
기면성 뇌염이 본격적으로 의학계의 관심을 끌게된 시점은 1918년부터 거의 판데믹(범유행) 수준으로 이 질환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이며, 이 질환으로 인해 사망에 이르거나 후유 장애를 얻은 사람들은 거의 백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되고 있습니다(각주 3). 그리고 질병 확산 시작 후 거의 10년째가 되던 1927년에 갑작스럽게 유행 사태가 종식되었습니다.
이 질환의 정확한 원인은 불명확하나 어떠한 감염이 선행한 후에 나타나는 자가면역 반응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고 있으며, 실제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감염 이후 기면성 뇌염 증상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연구 결과도 있었습니다(각주 4). 그러나 여전히 1900년대 초반을 휩쓸었던 기면성 뇌염 범유행의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원인과 별개로, 이 질환이 급속도로 전세계에 퍼지게 된 것은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이동과 관계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각주 5).
이 질환은 급성기에도 기면증과 같은 신경학적 이상 증상이 나타나지만, 만성기 증상과 후유 증상으로 떨림, 근육 강직, 느린 움직임과 같은 파킨슨 증상(Parkinsonism)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파킨슨증을 가진 환자들을 대상으로 파킨슨병의 치료제인 레보도파(Levodopa)를 투여하여 증상이 호전되는 것을 관찰할 수도 있었는데(각주 6), 이와 같은 내용을 영화화한 것이 바로 1990년에 개봉했던 영화인 ‘Awakenings (한국 개봉명은 ‘사랑의 기적’)’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여, 범유행하던 기면성 뇌염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파킨슨증으로 누워지내던 환자에게 레보도파를 투여하여 잠시나마 기적적인 치료 반응을 보게 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치료를 시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의사(로빈 윌리엄스)와 40년만에 다시 일어나서(awakening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여러가지 경험을 하게 되는 환자(로버트 드 니로)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명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기면성 뇌염이나 파킨슨증 치료에 대한 내용을 모르고 보더라도 감동적인 영화이므로 아직 본 적 없는 분들이라면 한 번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레보도파라는 약물이 처음 개발될 때의 모습도 나오게 되므로 그 점에도 주목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면성 뇌염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길어졌는데, 이 질환의 이름 속에는 그리스 신화와의 관련성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망각의 여신 ‘레테(Lethe, Λήθη)'의 이름이, 무기력과 기면을 의미하는 ‘lethargy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레테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딸(헤시오도스 전승) 혹은 하늘의 신인 아이테르와 땅의 여신 가이아 사이의 딸(히기우스 전승-각주 7)이라고도 전해지는데, 어쨌든 ‘망각’이라는 개념을 의인화한 여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망각을 담당한다는 특성 때문에, 기억의 여신인 ‘므네모시네’와 함께 엮여서 알려져 있기도 하나 므네모시네는 보통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티탄 신족으로 알려져 있어 자매라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하기도 합니다(히기우스 전승에 따르면 이부자매일 수도 있으나…).
또한, 레테는 저의 이전 글인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도 등장했던 강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저승 혹은 지하세계에는 다섯 개의 강(아케론, 플레게톤, 코퀴토스, 레테, 그리고 스튁스)이 흐르며, 그 강들을 모두 건넌 후에 인간들의 영혼은 저승의 판관인 미노스(Minos, Μίνως)의 판결에 따라, 죄가 깊은 자들은 지옥이라 할 수 있는 타르타로스에 가기도 하고 선량하고 정의로운 자들은 낙원인 엘뤼시온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옥이나 낙원에 갈 정도가 아닌 사람들은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잊고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망각을 담당하는 ‘레테’의 강물입니다. 이 강은 잠의 신인 히프노스의 거처 주변을 휘돌아 흐르며, 강가에는 사람을 몽롱하고 잠에 취하게 만드는 여러가지 식물들(양귀비와 같은)이 피어 있다고 묘사됩니다.
레테 강의 물을 마시면 이승에서의 기억을 모두 잃게 되는데, 이는 다음 생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므네모시네와 엮어서, 므네모시네라는 연못이 레테 강의 근처에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며, 레테의 강물 대신 므네모시네의 연못물을 마시면 전생의 기억을 잊지 않을 수 있다고도 합니다. 흘러가는 강물은 망각으로, 고여있는 연못의 물은 기억으로 설정한 비유가 재밌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망각을 의미하는 레테가 어째서 ‘무기력’과 ‘기면’을 의미하는 ‘Lethargy’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 기억과 반대되는 개념이면 ‘기억 상실증(amnesia)’ 정도일 것 같은데 혼수 상태와도 비슷한 기면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레테 강물을 마신 사람들을 묘사하는 신화 속의 내용을 보면, 아주 적절한 어원이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레테의 강물을 마시게 되면 단순히 기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희로애락도 느끼지 못하고 세상만사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완벽하게 지난 삶의 흔적을 지워버리는 것이죠(기계로 비유하자면 컴퓨터의 포맷과 비슷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승에 간 영혼들이 강물을 마시고 나서 기억이 소실될 뿐만 아니라, 감정의 동요도 없고,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도 없는 상태로 멍하니 앉거나 누워있는 모습이었다면, ‘기면성 뇌염’에 걸렸던 환자들의 상태와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레테의 강물은 이미 생을 마친 영혼들이 마시는 것이므로 그들의 ‘Lethargy’ 상태에 빠지는 것은 새로운 시작 전의 쉬어가는 시간에 가깝지만, 기면성 뇌염 환자들은 삶이 지속되고 있으므로 그 상태에서 깨어나야만 합니다.
현대 의학은 신경계 질환에 대한 원인 규명과 치료법 개발에 대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기면성 뇌염 환자들에게 므네모시네의 연못물과 같은 완벽한 치료 방법을 안겨줄 날을 기다려봅니다.
<각주>
1. CMAJ. 2021 Sep 20;193(37). Encephalitis lethargica: Last century's long haulers? Kenton Kroker
2. Honigsbaum M, Krishnan L. Taking pandemic sequelae seriously: from the Russian influenza to COVID-19 long-haulers. Lancet 2020;396: 1389-91.
3. Hoffman, Leslie A.; Vilensky, Joel A. (2017-08-01). "Encephalitis lethargica: 100 years after the epidemic". Brain. 140 (8): 2246–2251.
4. Haeman, Jang; Boltz, D.; Sturm-Ramirez, K.; Shepherd, K.R.; Jiao, Y.; Webster, R.; Smeyne, Richard J. (2009). "Highly Pathogenic H5N1 Influenza Virus Can Enter the Central Nervous System and Induce Neuroinflammation and Neurodegeneration".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06 (33, August 10): 14063–14068.
5. Ravenholt RT, Foege WH. 1918 influenza, encephalitis lethargica, parkinsonism. Lancet. 1982 Oct 16;2(8303):860-4
6. Bigman DY, Bobrin BD. Von Economo's disease and postencephalitic parkinsonism responsive to carbidopa and levodopa. Neuropsychiatr Dis Treat. 2018;14:927-931.
7. 가이우스 율리우스 히기누스(라틴어: Gaius Julius Hyginus, 기원전 64년경 ~ 기원후 17년), 고대 로마 시대의 라틴어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