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 신화(Celtic mythology)는 켈트 족이라고 불리우는 민족 집단에게서 널리 믿어지던 신비한 이야기들입니다. 원래는 갈리아족이 살던 서유럽 전반에 퍼져있던 설화들의 묶음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대에는 켈트족이 살아남은 지역인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와 콘월 지방 등에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래의 지도에서 가장 진한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들이 현대까지도 갈리아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곳입니다.
켈트족들과 연관된 갈리아 언어(Gaelic language)와 문화가 퍼져있는 지역들(출처-위키피디아).
켈트 신화의 특징은, 그리스-로마 신화나 게르만 신화, 혹은 여러 유일신교 신화들과 다르게, 신들의 존재가 인간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종교나 신화에서 흔히 접하는 ‘신적 존재’란, 그 능력이 인간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하며, 보통은 불로불사이고, 세상의 시작과 끝을 모두 지켜보는 정도의 기나긴 시간과 저승과 이승(지상과 천상, 지하, 해저, 우주 등) 등의 다양한 차원을 넘나드는 공간을 영위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신들의 영역인 올림포스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다스리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
그러나 켈트 신화를 처음 읽어보면 신화 속에서 ‘신’이라고 불리우는 존재들이 우리가 기대하는 신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당황하게 됩니다. 그들은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하며, 생각보다 허무하게 권좌를 잃고 신화의 무대에서 퇴장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로마 신화로 치면, 영웅이나 요정(님프) 정도의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 ‘신’이라고 칭해지기 때문이죠.
켈트 신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아일랜드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건 신화라기보다는 아일랜드라고 하는 땅에 들어오게 된 여러 도래 민족들의 전설에 약간의 신화적 상상을 덧붙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일랜드(에린) 신화 속의 도래 민족들에 대한 내용을 보면, 카사르 -> 파르홀론 -> 네메드 -> 피르 볼그 -> 투어허 데 다넌 -> 밀레시안의 순서 대로 지배 민족이 바뀌게 되는데,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지배 민족이 바로 ‘투어허 데 다넌(Tuatha dé Danann, 다누의 일족이란 뜻)'이며, 아일랜드 신화의 중심적인 내용이자 현대의 다양한 켈트 신화 기반 판타지 작품(소설, 만화, 게임 등등)에서 자주 다뤄지곤 합니다.
이 ‘투어허 데 다넌’은 결국엔 밀레시안이라는 일족에게 밀려나게 되는데, 그들이 아일랜드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된 후에 서쪽의 낙원 같은 섬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그 장소의 이름이 바로 ‘티르 나 노그(Tír na nóg)’입니다. 이 장소의 이름 역시 판타지 작품 속에서 종종 언급이 됩니다. 일부 낙원으로 떠나기를 거부한 투어허 데 다넌들은 시(Sidhe)라고 불리는 봉분(무덤, 고분) 아래의 지하 세계로 들어가 살며, 에스시(이스시, aos sí)라고 불리는 요정기사(몸의 크기가 매우 작은)가 되어 살고 있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요정기사가 된 투어허 데 다넌의 행진 모습. John Duncan's "Riders of the Sidhe" (1911).
투어허 데 다넌이 아일랜드를 지배하는 동안, 네 명의 위대한 왕들이 군림하며 다스렸다고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첫번째 왕이자 오늘 제가 다룰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누아다’ 혹은 ‘누아다 아르게틀람(Nuada Airgetlám, 은 팔의 누아다)’입니다.
‘누아다’를 묘사한 것이라고 전해지는 조각상.
투어허 데 다난의 이야기는 주로 전세대의 지배민족인 피르 볼그와의 전투, 그리고 바다에서 온 거인형 괴물로 묘사되는 포모르(혹은 포보르, Fomoire)들과의 싸우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누아다는 초대 왕 답게 피르 볼그 및 포보르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누아다가 겪은 가장 큰 전투 두 개(‘모이투라’라는 평원에서 벌어진)가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전투인 피르 볼그와의 싸움에서 오른팔을 잃게 됩니다. 전투 자체는 승리로 이끌었지만, 한 쪽 팔을 잃은 누아다는 왕위에서 내려와야했는데, 켈트 족의 전통 상 신체적으로 결함이 있는 자는 왕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왕이 전사로서의 능력을 갖추는 것을 중요시하던 문화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쨌든 이 부분에서 상당히 신화다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의술의 신인 ‘디안케트(Diancecht)’ 가 누아다의 팔을 고쳐주기 위해 ‘은(silver)’으로 의수(義手)를 만들어 달아주게 된 것이었죠. 누아다가 ‘은 팔의 누아다’라는 별칭을 얻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의사로서 좀 흥미로웠던 것이, 상당히 현실적인 내용과 신화적인 상상력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아다가 가졌을 은으로 만든 팔에 대해 상상해보면, 마블 영화 속 윈터솔져가 지니게 된 금속의지와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검에 의해 팔다리가 잘리거나 복합골절이 발생했을 경우(실제 전투 시에 사용하던 검들이 생각보다 날이 무디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잘리지는 않고 뼈가 부서지는 형태의 부상을 입었을 경우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 부상당한 부분을 다시 접합하거나 수술적 치료로 회복시키기 어려워 부상 부위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냥 절단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쇼크, 과다 출혈, 혹은 상처 감염에 의한 패혈증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중세 시대에 팔을 잃은 기사들이 착용했다고 전해지는 금속 의수.
아마 신이라고 불리지만 인간에 가까운 존재인 누아다 역시 검에 의해 오른팔에 부상을 입게 되자 결국 팔을 절단하는 처치를 받게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고대의 의술 수준을 생각하면 그대로 사망했을 수도 있는 부상이지만, 나름 신화적인 위대한 존재이기에 큰 부상에 의한 고비를 이기고 살아남았으며, 또 다른 신화적 존재인 디안케트의 신묘한 의술(이라기 보단 마술에 가까워 보이지만)의 힘으로 ‘은으로 만들어진 의지’를 갖게 된 것입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자기의 원래 수족처럼 기능하는 의지’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으나, 이 이야기는 신화이기에 ‘은’이라는 금속으로 누아다의 잃어버린 오른팔을 대신할 의지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저는 여기서 ‘은’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을 했는데, 우선은 은이라는 금속 자체가 워낙 고대부터 귀중하게 여겨지고, 여러가지 모양으로 가공이 쉬운 편이라 고귀한 존재인 ‘신들의 왕’에게 사용되기에 적절하다고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귀한 금속으로서의 가치와 가공의 편리성 외에도, 은의 사용은 의학적으로도 상당히 유의미한 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은이 가지고 있는 높은 항균 효과와 낮은 독성입니다(각주 1, 2).
은 혹은 은화합물들은 은이온(Ag(+))을 방출하게 되는데, 이 은이온이 박테리아나 곰팡이의 세포막에 작용하여 항균효과를 일으키게 되며, 이로 인해 은을 물의 정화, 상처 치료, 뼈 보철물, 재건 정형 외과 수술, 심장 장치, 카테터 및 수술 기구 등에 활용하는 방법이 발전되어 왔습니다(각주 3, 4).
특히 뼈 보철물로 은을 코팅한 재료를 사용할 경우, 초기 감염 발생률도 낮아지고, 보철 자체의 5년 생존율이 증가하며, 이식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덜 공격적인 항염증치료를 시행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습니다(각주 5).
고대 사람들이 현대와 같은 정도로 은의 효용성에 대해 알고 있진 않았겠지만, 디안케트가 은으로 누아다의 의수를 만들어낸 것은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 봐도 굉장히 합리적이고 훌륭한 선택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청출어람이란 말에 어울리게도, 디안케트의 아들인 미아흐(Miach)는 누아다에 대해 더욱 놀라운 치료 방법을 제시하게 됩니다. 미아흐는 누아다의 은으로 만들어진 의수를 피와 살로 이루어진 온전한 팔로 교체해주게 됩니다. 전승에 따라서는 누아다의 잘려진 팔에서 남아있는 뼈를 가지고 원래 팔을 복원해냈다고도 합니다. 사라졌던 팔이 온전히 이 정도면 거의 SF 영화 속에 나오는 미래의학기술처럼 느껴지는데, 현재의 기술로 가장 근접한 것으로 예를 들자면 ‘오가노이드(organoid)’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오가노이드란 인체에서 추출한 성체줄기세포(adult stem cell, ASC), 배아줄기세포(embryonic stem cell, ESC), 혹은 유도만능줄기세포(induced pluripotent stem cell, iPSC)등으로부터 자가 재생 및 자가 조직화를 통해 형성된 3차원 세포집합체를 뜻하는 것인데(각주 6), 현재까지는 체외 장기유사체 형성을 통한 질병모델 등으로 연구적으로만 활용되고 있으나 만약에 오가노이드 기술이 극한까지 발전한다면 인간은 본인이 필요한 장기나 신체부위까지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LGR5 줄기세포를 이용해 만들어진 소장 상피 유사장기 - 출처 위키피디아.
미아흐는 누아다의 팔을 만들어내는 것뿐만 아니라, 누아다의 외눈 문지기를 위해 고양이의 눈을 이식해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현대 의학적으로 보면 일종의 이종장기이식도 성공시켰던 셈인데요, 여러 가지로 아버지인 디안케트보다 한 수 위의 의술을 지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누아다의 팔이 완전 회복된 것으로 마냥 훈훈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아들의 뛰어남을 시샘했던 디안케트는, 결국 미아흐를 칼로 공격하여 죽이게 되는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잔인하지만 굉장히 의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디안케트는 칼로 미아흐의 머리를 네 번이나 공격하는데, 첫 번째 공격으로 ‘피부’만 상하게 햇더니 미아흐는 그 상처를 순식간에 스스로 고쳐버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에 ‘두개골’을 손상시켰으나 그 역시 금방 고쳐버렸고, 세 번째 공격으로 뇌의 일부분을 살짝 손상시켰으나 그 상처 역시 회복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디안케트가 미아흐의 뇌를 반으로 갈라버릴 정도로 공격하자 더 이상 회복하지 못하고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대 의학적으로 봐도 피부, 두개골, 작은 부위의 뇌손상(숨뇌 등이 아닌 이상)까지는 환자가 사망에 이르지 않고 회복이 가능하지만, 뇌가 반으로 쪼개질 정도의 손상은 회생이 불가능합니다. 고대 사람들도 머리를 다치는 정도에 따리 사람들의 생사나 회복 정도가 달라지는 것을 관찰한 바가 있었기에 이런 식으로 신화 속에 이야기를 넣어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고대에 이와 같은 신화를 상상하며 만들었던 켈트 사람들이 현대의 풍요로운 삶의 모습과 발달된 의학 기술들을 보게 된다면, 이곳이 자신들이 이상향이라 믿던 ‘티어 나 노그’이며 현대 의학 기술들을 다루는데 익숙한 우리들을 ‘투어허 데 다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아직은 우리가 은으로 팔을 만들거나 사라진 팔을 원래대로 복원하진 못하고 있으니 자신들이 믿던 신화 속 신보다는 한 수 아래라고 코웃음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주>
1. Gosheger G, Hardes J, Ahrens H, Streitburger A, Buerger H, Erren M, et al. Silver-coated megaendoprostheses in a rabbit modeldan analysis of the infection rate and toxicological side effects. Biomaterials 2004;25:5547e56.
2. Hardes J, Ahrens H, Gebert C, Streitbuerger A, Buerger H, Erren M, et al. Lack of toxicological side-effects in silver-coated megaprostheses in humans. Biomaterials 2007;28:2869e75.
3. Curr Probl Dermatol. 2006;33:17-34. doi: 10.1159/000093928. Silver in health care: antimicrobial effects and safety in use. Alan B G Lansdown
4. Biometals. 2013 Aug;26(4):609-21. doi: 10.1007/s10534-013-9645-z. Epub 2013 Jun 15. Antimicrobial silver: uses, toxicity and potential for resistance. Kristel Mijnendonckx, Natalie Leys, Jacques Mahillon, Simon Silver, Rob Van Hou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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