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atros Apr 29. 2022

깨어진 방역에 의해 일어난 돌이킬 수 없는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깨어진 거울] 속의 ‘풍진’

애거서 크리스티는(1890~1976년, 영국) 20세기 초부터 작품 생활을 시작하여(1923년 작품인 스타일스 저택 살인 사건),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추리소설계의 전설로 불리우는 작가입니다. 워낙 많은 작품을 쓰고 전세계적으로 20억부라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대의 추리소설에 사용되는 기법이나 클리셰의 원조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소설은 사건의 전말에 대해 추리해가는 재미 자체도 뛰어나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게 만드는 원인(욕망이나 분노, 원한 등등)이나 이 사건에 휘말린 사람들의 심리 변화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잘 묘사되어 있어 작품에 대한 몰입감을 키워주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사진(1958년).


저도 10대에서 20대에 걸쳐 애거서 크리스티의 수많은 추리소설들을 즐겨 읽었으며, 그녀의 작품을 토대로 만든 드라마나 영화들도 즐겨보았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고전에 반열에 들어서인지, 최근에 다시 만들어진 영화들에서도 그 특유의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년)]과 [나일 강의 죽음(2022년)]의 포스터 이미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으며, 특히 그녀 작품 내의 대표적인 두 탐정인 ‘에르퀼 푸아로’와 ‘미스 마플’ 중 누가 등장하냐에 따라서도 좀 더 전문적인 범죄물과 일상 추리물의 서로 다른 매력을 느껴볼 수 있기 때문에 탐정에 따라서도 골라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영상화 된 작품들 속에서의 에르퀼 푸아로(좌)와 미스 마플(우)의 이미지.


제가 오늘 다루려는 작품은 ‘미스 마플’이 탐정으로 등장하며, 의사가 된 후에 다시 읽었을 때 가장 안타깝다고 느꼈던 내용을 보여줬던 소설인 ‘깨어진 거울(원제: 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 1962년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제목부터 무언가 크나큰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소설을 좀 더 재밌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 제목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깨어진 거울’의 원제인 ‘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 (거울이 양쪽으로 깨졌다)’라는 문장은 빅토리아 시대의 유명한 작가인 알프레도 테니슨(Alfredo Tennyson)의 시, ‘샬롯의 아가씨(The Lady of Shalott)’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이 시는 아서왕 이야기를 모티프 삼아서, 가장 유명한 원탁의 기사 중 하나인 란슬롯을 짝사랑하게 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이 샬롯의 아가씨는 그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인해 저주를 받아 평생 카멜롯(아서왕이 다스리던 곳) 근처의 탑에 갇혀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절대 탑의 바깥 세상을 직접 볼 수 없었고(밖을 보는 순간 죽음이 다가오는 저주가 발동됨), 대신에 마법의 거울을 통해 세상을 감상하며 그 풍경들을 묘사하는 아름다운 테피스트리를 만들면서 살아갔습니다.


The Lady of Shalott by William Maw Egley (1858)


그러던 어느 날 거울 속에서 너무도 잘생기고 늠름한 모습의 ‘란슬롯’을 보게 되었고, 그 순간 란슬롯에 대한 사랑에 빠져 창문 밖을 직접 내려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창문 밖을 보자마자 마법의 거울은 깨어졌으며(The Mirror Crack'd from Side to Side), 샬롯의 아가씨는 깨진 거울을 보며 자신에게 죽음의 저주가 내렸음을 깨닫게 됩니다.


The Lady of Shalott by John William Waterhouse (1888).


그러나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음을 란슬롯에게 전하기 위해 자신이 짠 테피스트리를 들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며 사공도 없는 배에 올라타 카멜롯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그녀는 카멜롯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숨이 끊어졌으나 그녀를 실은 배는 카멜롯에 도착하여, 카멜롯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란슬롯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참으로 아름다운 얼굴이구나, 하나님 그녀에게 은총을 내려주소서.”라고 말하며 샬롯의 아가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이 슬픈 시는 끝을 맺게 됩니다.


그림. The Lady of Shalott by George Edward Robertson (1900).



이 시를 먼저 접하고나서 소설 ‘깨어진 거울’을 읽게 되면, 범인의 윤곽이 조금 더 일찍 잡히게 되는 점도 있고, 범인이 범행을 결심하게 되는 심정이 ‘샬롯의 아가씨’가 마법 거울이 깨어지는 것을 보며 저주가 내렸음을 깨닫는 순간의 심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깨어진 거울의 이야기는 미스 마플이 살고 있는 세인트 메리 미드 마을에 ‘마리나 그레그’라고 하는 유명 여배우가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미 전성기는 지났다고 하나 왕년의 유명 배우인 마리나는 마을에 있는 가싱턴 홀이라는 저택을 구매하였고, 이를 리모델링 한 후에 세인트 존 야전병원 후원 파티를 열기 위해 일반에게 개방시킵니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마을에서 지극히 좋은 의도를 가지고 열린 이 파티에서 갑자기 사망(살인?)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파티의 와중에 발작을 일으키며 사망한 ‘헤더 베드콕’은, 오지랖 넓고 호들갑스러울지 언정, 딱히 누군가에게 미움이나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영화 ‘깨어진 거울 (1980년)’의 포스터 이미지. 이 영화에서는 전설적인 여배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마리나 그레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헤더의 시체를 조사해보니 그녀는 ‘Calmo (안정제 계통으로 벨라도나 성분도 포함된)’라는 약제를 기준치보다 6배 이상 복용한 상태였고, 그 약은 그녀가 마셨던 칵테일 잔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게다가 알고보니 원래 그 칵테일은 배우이자 파티의 주최자라 볼 수 있는 마리나가 마셨어야할 음료였습니다.


이 부분까지 읽은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마리나를 노렸던 살인의 마수가 어이없게 무고한 ‘헤더’에게 잘못 뻗쳐진 것인가? 그럼 마리나는 무슨 원한을 살 일이 있었던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탐정 ‘미스 마플’은 여러 가지 정황들을 조사하고 정보를 수집한 끝에, 아무도 상상 못했던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게 됩니다. 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헤더와 이야기를 나누던 마리나가 ‘저주가 닥쳐올 것을 깨달은 샬롯의 아가씨 같은 표정을 지었다’라는 밴트리 부인의 증언과 그런 표정을 짓던 마리나가 바라보았던 것이 사실 ‘헤더의 등 뒤에 걸려 있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림’ 이었다는 사실이 나름 중요한 추리의 근거로 등장하게 됩니다.


성모와 아기 예수. 라파엘의 작품(1506년).


결론적으로는 마리나가 헤더에게 가졌던 ‘원한’이 이번 살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었는데, 이 원한이 생기게 된 까닭이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헤더는 마리나의 팬으로 자신이 사는 마을에 온 마리나가 반가워서 파티로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붙잡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자랑스럽게’ 그녀가 마리나를 예전에도 만난 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고백이 마리나를 저주받은 샬롯의 아가씨와 같은 상태로 만들어버립니다. 헤더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마리나가 버뮤다에 방문했을 때 자신도 그 곳에서 일하는 중이었는데, “비록 ‘풍진(German measles 혹은 Rubella)’에 걸린 상태였지만 당신을 너무나도 만나고 싶어서 결국 만나러 가서 인사를 나눴다.”라는, 자신의 크나큰 팬심을 드러내는 이야기였죠.


풍진에 걸린 아이의 사진, 전신에 붉은 발진이 관찰되고 있습니다. 출처-위키피디아.


그러나 이 이야기는 마리나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게 된 원인’을 알려주는 끔찍한 악몽일 뿐이었습니다. 헤더가 풍진에 걸린 채 마리나를 만났을 때, 마리나는 임신 초기였고 그 때 결국 풍진에 감염되어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낳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원흉이 자신 앞에 서있음을 알게 된 마리나는, 자신과 자신의 아이의 슬픔(혹은 자신의 크나큰 모성애를)을 떠올리게 만드는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림을 바라보고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자신에게 방금 들이닥친 저주, 자신의 헤더에 대한 살의를 실행에 옮기기로 말이죠. 그리고 ‘깨어진 거울’ 속 살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풍진이라는 질환은, 풍진 바이러스(Rubella virus) 감염에 의해 발생하며 ‘MMR 백신(MMR vaccine-홍역/볼거리/풍진 백신)’이라는 존재 덕분에 상당히 많은 분들, 특히 어린 아이를 키워 보신 분들은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MMR 백신은 유아기와 6세 이전에 두 번의 접종을 받게 되며, 보통 이 접종을 잘 마치면 풍진에 대해서는 97% 이상의 예방 효과를 가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각주 1, 2). 그리고 한 번 풍진에 걸렸던 사람은 다시는 풍진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각주 3).


풍진은 어린 나이에 주로 걸리는 질환이고, 요즘에는 백신 덕분에 심하게 앓는 경우를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풍진이 아직도 조심해야만 하는 질환인 이유는 바로 임신 초기의 여성이 이 바이러스에 노출될 경우에 아이를 유산하거나 ‘선천성 풍진 증후군(Congenital Rubella Syndrome, CRS)’을 앓는 아이를 출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선천성 풍진 증후군은 아직도 매년 전세계적으로 10만명 이상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주로 풍진에 결린 환자의 기침을 통해 감염될 수 있다고 합니다(각주 3). 임신 초기(1st trimester)의 여성이 풍진에 걸린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태아가 백내장 등 안구 장애, 청각 장애, 심장 및 뇌 질환 등을 가진 채 태어날 수 있습니다(각주 4, 5).


선천성 풍진 증후군에 의해 백내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 출처-위키피디아.


풍진은 몸에 특유의 발진이 일어나기 1주일 전후로 전염력이 있으며(각주 6), 이 기간의 환자와 접촉할 경우 풍진에 감염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아마 소설 속의 헤더 역시 발진이 아직 발생하기 전후에(발진이 돋아나 있었다면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마리나를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고, 당시 임신 초기여서 별로 임산부처럼 보이지 않았던 마리나였기에 헤더 자신이 위험한 행동을 했다고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 아무렇지 않게 아름다운 추억인양 둘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이었으나, 선천성 풍진 증후군을 가진 아이를 낳고 평생을 괴로워하던 마리나로서는 헤더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절망감이 솟아났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도 마리나의 비극에 가슴이 아팠지만, 의사가 되고 나서 읽었을 때는 ‘헤더가 그냥 자가격리를 유지했다면, 혹은 풍진 백신이 좀 더 빨리 개발이 되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와 같은 생각이 들면서 더욱 큰 안타까움을 느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악의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인 마리나에게 상처를 입힌 헤더나 피치 못할 감염으로 인해 자신과 아이 모두 아픔을 겪어야했던 마리나 모두가, 아무런 죄없이 탑 속에 갇혔다가 사랑으로 인해 저주를 받은 샬롯의 아가씨와 비슷한 처지였습니다.






풍진은 1969년에 바이러스 감염 예방 효과가 출중한 백신이 개발되고, 백신 접종이 전 세계적으로 5억 도즈 이상 실시되었을 정도로 집단 면역이 잘 형성되면서 선천성 풍진 증후군의 발생 위험성도 많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소설이 발표되던 1962년보다는 풍진에 대해서 더 안전한 세상이 된 것이죠.



그러나 풍진은 아직 근절된 것이 아니며, 풍진이 아닌 여러가지 바이러스 질환들도 많으며, 다양한 종류의 바이러스 감염이 임산부나 기타 면역 저하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지도 다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정상면역을 지닌 사람들이 가볍게 지나가는 바이러스 질환이 임산부 및 면역저하자에게는 치명적인 증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임산부의 경우에는 태아에 대한 악영향도 고려해야 하며 임신 상태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충분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항상 감염에 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진 거울’은 1960년대에 나온 추리소설계의 고전이지만, COVID-19 판데믹의 시기를 견뎌온 우리에게는 단순한 추리소설 이상의 울림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건강한 내가 저지른 부주의가 면역이 저하된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지극히 의학적인 교훈이 담겨있는 이야기로도 해석이 가능하겠습니다.








<각주>

(1)   “MMR Vaccination What You Should Know Measles, Mumps, Rubella”. 《CDC》

(2)   “Addressing misconceptions on measles vaccination”. 《European Centre for Disease Prevention and Control》

(3)   Lancet. 2015 Jun 6;385(9984):2297-307. doi: 10.1016/S0140-6736(14)60539-0. Epub 2015 Jan 8. Rubella. Nathaniel Lambert, et al.

(4)   Prenat Diagn. 2014 Dec;34(13):1246-53. doi: 10.1002/pd.4467. Epub 2014 Sep 16. Rubella and pregnancy: diagnosis, management and outcomes. Elise Bouthry, et al.

(5)   Congenital Rubella. Samarth Shukla and Nizar F. Maraqa. In: StatPearls [Internet]. Treasure Island (FL): StatPearls Publishing; 2022 Jan. 2021 Aug 13.

(6)   Atkinson, William (2011). 《Epidemiology and Prevention of Vaccine-Preventable Diseases》 12판. Public Health Foundation. 301–323쪽.

매거진의 이전글 켈트 신화: 은팔의 누아다와 의술의 신 디안 케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