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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May 22. 2022

상아로 만들어진 펠롭스의 어깨

그리스 신화 속에 나타난 백반증

제가 작년에 ‘듄(2021)’이라는 영화의 리뷰를 쓰다가 ‘아트레이드 가문’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폴’이 속한 가문인데, 그 어원은 그리스 신화 속에서 매우 유명한 가문입니다. ‘아트레이드’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가 '아트레우스(Atreus)의 인물의 자손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 가문에 속하는 인물들로는 트로이 전쟁의 주역인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그리스 신화 속 최고 미녀인 헬레네의 남편) 등이 있습니다.

듄의 영화 포스터 이미지. 정중앙에 서있는 인물이 주인공인 폴 아트레이드.


이 가문의 특징을 다시 한 번 알려드리자면, 그리스 신화 속에서 가장 불경한 인간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자를 선조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바로 오늘 제 글의 주인공인 '펠롭스(Pelops)'의 아버지인 ‘탄탈로스(Tantalus)’입니다.

탄탈로스는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와 님프 플루토(Plouto)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현재는 터키에 속하는 지역인 프리기아(혹은 시필루스)라는 곳을 다스리는 왕이였습니다. 

제우스와의 인연 덕분인지, 탄탈로스는 인간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올림포스 신들의 연회에 초대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들과 가까워졌다는 오만함이 생겨나서인지, 필멸자인 인간으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행동들을 저지르게 됩니다.

탄탈로스가 다스리던 지역에 있는 시필루스 산. 저 바위는 탄탈로스의 딸인 니오베가 돌로 변한 모습이라고 전해집니다.


우선 탄탈로스는 신들의 불로불사 비결로 알려져 있는 신비의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를 훔쳐내어 자신과 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신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는데, 탄탈로스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들의 ‘전지전능함’을 시험하기 위해 매우 끔찍한 연회를 준비합니다.


자신의 아들인 ‘펠롭스’를 죽여서 그의 몸을 자르고 삶아 요리를 만들어 신들에게 대접한 것이었습니다. 신들이 과연 자신의 아들로 만든 요리를 즐길 것인지 아니면 재료를 눈치채고 먹지 않을 것인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신들은 모두 탄탈로스가 만든 음식의 재료가 무엇인지 눈치챘기에 그것에 손도 대지 않았으나, 오직 농경의 여신 데메테르만이 무심코 그 음식을 조금 먹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당시에 사랑하는 딸 페르세포네의 실종으로 정신이 없었기에 이 상황에 집중할 수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어쨌든 친자식을 죽여 음식으로 만들고 신들의 능력을 시험하려 했다는 죄의 무게는 엄청났기에, 탄탈로스는 지옥인 타르타로스로 끌려가 영원의 형벌을 받게 됩니다. 아무래도 ‘음식’에 관련된 죄를 지었기 때문인지 영원토록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려야 하는 벌을 말이죠.

타르타로스에서 끝없는 배고프모가 목마름으로 고통 받는 탄탈로스. Gioacchino Assereto의 작품. 1640년 작품.


어쨌든 죄없이 죽은 펠롭스를 가엽게 여긴 제우스는 운명의 여신인 ‘클로소(운명의 실을 만들어내는)’에게 명하여 그를 다시 살려내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 펠롭스를 다시 살려내는 과정도 좀 신기한데, 클로소는 조각난 펠롭스의 몸을 모아 ‘신성한 가마솥’에 넣어 다시 삶는 방법으로 죽은 아이를 되살려냅니다. 그러나 이 때 이미 데메테르가 먹어버린 한 쪽 어깨 부분은 찾을 수가 없었기에, 이 부분만은 데메테르 혹은 헤파이스토스가 ‘상아’를 이용해서 다시 만들어 주게 됩니다.

되살아나서 '피사'를 다스리는 왕이 되는 펠롭스. 그림을 보니 다행히 이후로는 무병장수 한 것 처럼 보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되살아난 펠롭스는 상아로 인해 하얗게 반짝이는 어깨를 지니게 되었고, 이 특성은 펠롭스의 후손들에게도 전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1).


펠롭스의 아들인 아트레우스와 그 후손인 ‘아트레이드 가문’의 특성으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펠롭스는 아버지인 탄탈로스가 다스리던 프리기아 지역을 떠나 그리스로 와서 피사(Pisa, 그리스 올림피아 근처에 있는 지역)라는 도시를 다스리는 왕이 되며, 펠로폰네소스(Peloponnese, ‘펠롭스의 섬’이라는 뜻) 반도에 본인이 이름을 붙을 정도로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현대 지도에서 보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위치(좌)와 펠롭스가 다스리던 '피사'의 대략적인 위치(우, 별표)

물론 빛나는 어깨뿐만 아니라, 탄탈로스가 지은 죄로 인한 저주도 가문에 내려져서인지 이후로 아트레이드 가문은 엄청난 막장 가족사를 써내려가게 됩니다(https://brunch.co.kr/@ef4da8729340415/55).




이 이야기 속에서 펠롭스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과정은 ‘신화 속 이야기’로 밖에 볼 수 없는 신비한 내용입니다. 사실 현대의 의학과 과학 수준으로는 펠롭스처럼 잔혹한 방법으로 완전히 사망한 존재를 아무런 문제없이 되살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솔직히 미래에도 과연 가능한 기술(?)일까 라는 생각이 드는, 말 그대로 ‘신의 능력’이란 표현에 걸맞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펠롭스가 지니게 된 ‘상아로 된 어깨’라는 부분에만 집중해보면 현대 의학적으로 해석해 볼만한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탄탈로스와 펠롭스가 신들과 얽힌 이야기 자체가, 펠롭스가 지니고 있는 ‘유난히 하얀 어깨 부위의 피부’ 때문에 생긴 이야기라고 생각해보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사실 펠롭스가 지니고 있던 어깨 부위의 유난히 하얀 피부색은 ‘백반증(Vitiligo)’에 의한 증상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양손 부위에 백반증이 발생한 환자의 사진(출처-위키피디아).


백반증은 가장 흔한 탈색 피부 장애(depigmenting skin disorder)로 전세계적으로 보면 유병률이 0.5~2%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2).

백반증이 발생하는 원인은 정확히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피부의 색소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는 멜라닌세포(melanocyte)가 손상되어 그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3).

최근에는 백반증을 자가면역 질환(autoimmune disease)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러한 백반증이 발생하는 위험도의 80%정도는 유전적 소인의, 나머지 20% 정도는 환경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4). 백반증 자체는 유전병은 아니지만, 부모나 형제가 백반증을 가졌을 경우에는 발생 위험도가 7~10배까지 증가한다는 역학 연구도 있었습니다(5).

백반증은 크게 비구역 백반증(non-segmental vitiligo)과 구역 백반증(segmental vitiligo)으로 분류되며, 이 분류는 두 가지 형태의 백반증이 지니는 병리 기전, 임상 양상, 그리고 예후 등이 차이에 따라 생겨난 것입니다(6).

이 중에서 구역 백반증은 전체 백반증의 10% 정도를 차지하며, 비구역 백반증보다 좀 더 어린 나이에 발병(주로는 아동기, 대부분은 늦어도 30세 이전에 발병)하며 특징적으로 ‘몸의 한 쪽 편’에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피부의 탈색 형태는 분필처럼 하얀 색을 띄며 주위의 정상 피부와 굉장히 잘 구분되는 경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병변이 햇빛에 잘 노출되는 부위(얼굴, 손과 다리, 목 등)에 발생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합니다.

구역 백반증의 경우에는 발생하고 나서 6~24개월 간은 병변이 늘어나는 양상을 보이다가 그 이후에는 병변이 더 이상 커지지 않고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구역 백반증의 치료로는 치료용 자외선을 이용한 광선 치료(phototherapy), 국소적인 스테로이드 크림 사용, 부분 피부 이식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화장품으로 본인의 피부색과 맞추는 방법이나 의료적 문신 등이 활용되기도 합니다.

백반증은 치명적인 질환은 아니지만, 남들과 달라 보일 수밖에 없는 피부 병변으로 인하여 이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심리적인 고통을 주며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만들기도 합니다. 특히 어린 나이에 발병한 환자들의 경우에는 성장 과정에서 많은 스트레스 받고 자신감이 저하되거나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데 위축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부 병변 자체에 대한 치료와 더불어 환자의 심리적 안정에 대한 고려와, 환자를 만나게 되는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배려 역시 필요합니다.



신화 속 펠롭스는 의학적으로 보자면 어린 시절에 발병한 구역 백반증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어린 나이에 죽었다 살아난 이후에 신이 만들어준 상아색 어깨를 지니게 되었다는 전설은, 그 시기부터 한쪽 어깨에 국한된 양상의 백반증이 발생한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주로 입던 의상인 키톤(Chiton: 어깨를 대부분 노출하는 형태의 옷)이나 지중해 지역의 일조량 등을 고려할 때, 펠롭스가 지닌 어깨 부위의 백반증은 상당히 눈에 띄는 특징이었을 듯합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사람들이 자주 입던 의상인 키톤이 묘사되어 있는 대리석 조각상.


펠롭스의 어깨에 나타난 증상이 구역 백반증이 맞았다면 어깨 부위 이상으로 범위가 커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며, 현대 의사의 눈으로 볼 때는 별 다른 위험이 없는 질환이기에 펠롭스와 그 가족에게 잘 설명하고 치료 방법에 대한 안내도 해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는 고대 그리스이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가장 유명한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 조차도 백반증과 한센병(Leprosy, 예전에는 나병이라고도 불렸던)을 구분하지 못했었다고 합니다(3).


이러한 시대 상황을 고려해보면 펠롭스의 어깨는 남들에게 불길하게 여겨질 가능성도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펠롭스의 집안은 그리스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아닌 ‘프리기아’라고 하는 외지에서 이주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외부에서 이주한 집단이 그리스에서 왕국을 이루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신성함과 권위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를 위해 펠롭스의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어깨를 ‘내가 신들의 연회에서 죽었다 살아났을 때 신들께서 부족한 어깨 부분을 귀한 상아로 만들어서 붙여 주셨다!’라는 프로파간다를 만드는 방향으로 활용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펠롭스의 자손 중에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신께 선물 받은 상아 어깨가 집안 대대로 내려오고 있다.’라고 설명하며 아트레이드 가문의 권위를 세우고 자신들의 핏줄에 신성함을 더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펠롭스의 후손(손자 혹은 증손자)이자 트로이 전쟁 시대 그리스 동맹의 맹주였던 아가멤논을 묘사했다고 여겨지는 황금 마스크.


어찌 보면 펠롭스 이야기는 백반증에 대한 고대 그리스 왕족의 ‘심리 치료(혹은 정치적 선동)'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에도 완치할 수 없는 백반증에 대해서는 환자에게 심리적인 안정과 자신감을 되찾아 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니까요. 비록 과학적이진 않더라도, 남과 조금 다른 자신의 피부를 ‘신이 만들어준 선물’이란 해석을 해보는 것은 매우 멋진 발상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럴 때는 현대인도 고대인의 지혜를 빌려보는 것이죠.



물론 현재 피부과 영역에서도 백반증 치료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고 있으므로, 언젠가 ‘신이 선물한 백반증’을 인간의 힘으로 반납할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주>


(1) Tuite, Kevin. Pelops, the Hazel-Witch and the Pre-Eaten Ibex: On an Ancient Circumpontic Symbolic Cluster’. Antiquitates Proponticæ, Circumponticæ et Caucasicæ II. Department d’ Anthropologie Universite De Montreal, Quebec H3C 3J7, Canada (1997), pp. 11-28


(2) Krüger C, Schallreuter KU. A review of the worldwide prevalence of vitiligo in children/adolescents and adults. Int J Dermatol. 2012 Oct;51(10):1206–12.


(3) Christina Bergqvist, Khaled Ezzedine. Vitiligo: A Review. Dermatology. 2020;236(6):571-592.


(4) Christina Bergqvist, Khaled Ezzedine. Vitiligo: A focus on pathogenesis and its therapeutic implications. J Dermatol. 2021 Mar;48(3):252-270.


(5) Nath SK, Majumder PP, Nordlund JJ. Genetic epidemiology of vitiligo: multilocus recessivity cross-validated. Am J Hum Genet. 1994 Nov;55(5):981–90.


(6) Ezzedine K, Lim HW, Suzuki T, Katayama I, Hamzavi I, Lan CC, et al.; Vitiligo Global Issue Consensus Conference Panelists. Revised classification/nomenclature of vitiligo and related issues: the Vitiligo Global Issues Consensus Conference. Pigment Cell Melanoma Res. 2012 May;25(3):E1–13.


(7)   Ezzedine K, Whitton M, Pinart M. Interventions for Vitiligo. JAMA. 2016 Oct;316(16):17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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