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소설 [주홍색 연구]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의사'의 흔적
아서 코난 도일(Arthur Ignatius Conan Doyle, 1859~1930년)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영화화된 가상인물인 ‘셜록 홈즈의 아버지’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입니다.
코난 도일은 그의 작품인 [셜록 홈즈 시리즈] 덕분에 작가라는 직업만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그의 원래 직업은 바로 ‘의사(전문 분야는 안과)’였습니다.
코난 도일은 1876년부터 1881년까지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고, 그 당시에도 종종 글을 써서 잡지에 기고하곤 하였습니다. 의사가 된 후에는 포경선에서 선상 의사로 일하기도 하였고, 1881년에 의학 및 외과학에 대한 석사 학위를 받은 후에는 서아프리카 해안을 항해하는 군함에서 선의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각주 1,2).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쌓던 중에 1885년에 ‘척수 매독(Tabes dorsalis)에 관한 논문을 통해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각주 3). 그는 1882년부터 병원을 열고 일을 하였으나 환자가 많지 않아 수익도 매우 적었고, 그래서 환자를 기다리는 동안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1887년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소설인 <주홍색 연구(원제: A Study in Scarlet)>을 '비튼의 크리스마스 연감' 특집호에 발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커다란 인기를 얻지 못하였으나 1890년 후속작인 <네 개의 서명(The Sign of the Four)>을 발표하면서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여, 1891년부터 스트랜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라는 잡지에 셜록 홈즈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금도 못 낼 만큼 환자가 없던 진료실이 위대한 추리소설 탄생에 기여한 셈이죠.
이번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홍색 연구>는 첫 셜록 홈즈 소설이자, 아서 코난 도일이 의사로서의 업무를 하는 중에 쓰여진 작품이기에, 의사가 쓴 글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이 눈에 띕니다.
저도 의대에 입학하기 전에 읽었을 때는 ‘이게 그 유명한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소설이구나, 고전적이지만 매력이 있네.’ 정도의 감상을 느꼈지만, 의사가 되어 다시 읽어보니 코난 도일이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지니고 쓴 추리소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의사가 되고 나서 느꼈던, 소설 속에서 의사가 기술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홍색 연구>의 시작 부분을 보면, 셜록 홈즈의 친구이자 의사인 ‘존 왓슨(John H. Watson)'이 전투 중에 총상을 당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실제 1880년에 일어났던 영국-아프간 전쟁의 주요 전투 중의 하나인 ‘마이완드 전투(Battle of Maiwand)’에서,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왓슨은 ‘왼쪽 어깨뼈를 으스러뜨리고 쇄골 아래 쪽 혈관을 스치는 총상’을 입게 됩니다.
초반에 짧게 기술되는 부분이지만, 코난 도일이 의사로서 총상을 본 적이 있고, 또한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를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묘사가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상을 당한 왓슨은 후방인 페샤와르(현재 파키스탄 북부 지역)로 이송이 되었는데, 상처를 회복하며 지내던 도중 장티푸스(typhoid fever)에 걸려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실제 장티푸스는 살모넬라 균의 일종인 ‘Salmonella enterica serovar Typhi’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수인성 전염병으로 실제 인도는 장티푸스 유행 지역이기도 합니다.
장티푸스는 고열, 복통, 섬망 및 기타 전신 증상 등을 일으키고 제대로 관리와 치료를 해주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질환입니다.
성인 장티푸스 치료에 많이 사용되는 퀴놀론(Quinolone)계 항생제는 1962년에야 처음 개발되었으므로, 19세기를 살았던 왓슨은 대증치료로만 견뎌 내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심하게 앓고 나서 야윈 모습으로 영국에 귀국하게 됩니다.
왓슨이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는 내용은 정말 짧게 지나가지만 작가가 의사가 아니라면 실제 장티푸스 유행 지역을 파악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특정 질환에 감염되었음을 묘사했을까란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영국 런던으로 돌아온 왓슨은 자신이 지낼 하숙집을 구하려 하는데, 비싼 집세를 나누어 낼 수 있는 룸메이트를 찾던 중, 이전에 근무하던 병원에서 알고 지냈던 스탬포드라는 사람을 만나 셜록 홈즈를 소개받게 됩니다.
스탬포드는 셜록 홈즈가 ‘과학 분야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췄지만 약간 이상한 사고 방식을 지녔다’라고 설명하는데, 왓슨은 처음에 이 이야기를 듣고는 결록 홈즈가 자신과 같은 의학도일 거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과학 분야에 종사한다는 설명에 ‘의학도’를 떠올리는 것부터가 작가가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왓슨과 셜록 홈즈의 첫 만남에서 셜록은 실험을 하고 있는데, 그 실험에서 개발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과 반응하여 침전되는 시약’이며, 이것을 이용하여 범죄 현장의 혈흔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그 실험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부분도 ‘혈액’의 성분을 자세히 알고 있는 의사이기에 쓸 수 있는 부분이며, 이러한 성질을 지닌 화학약품이 훗날 실제로 개발된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현재 우리가 범죄 관련 프로그램 등에서 흔히 듣게 되는 물질인 ‘루미놀(Luminol, 1937년에 독일 과학자에 의해 개발됨)'이 바로 셜록 홈즈가 개발하고자 하던 시약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셜록은 자신의 실험 결과를 설명하고 나서 왓슨과 인사를 나누는데, 그 때 왓슨이 ‘아프가니스탄’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바로 맞추어 왓슨을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홈즈의 말에 왓슨은 큰 흥미를 느꼈고 결국 홈즈의 하숙집(베이커가 221B번지)에 입주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입주 후에 홈즈와 나누던 대화에서 ‘어떻게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다녀온 줄 알았는가?’에 대한 답을 듣게 됩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를 의사로서의 특징을 더해서 창조한 탐정이라는 것을 잘 알려주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셜록 홈즈는 왓슨이 ‘군인 티가 나는 의사’이므로 ‘군의관’이라는 것을 추론하였고, 악수할 때 본 피부는 하얀데 얼굴은 검은 편인 것을 보고 ‘최근에 열대 지방에 다녀온 사람’이며, 얼굴이 야윈 것을 보니 병을 앓았고 왼팔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것을 보고 부상을 당했음을 알아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영국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군의관이 부상당할 만큼 고생하는 열대 지방은 ‘아프가니스탄’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음을 설명합니다(드라마 속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은 거의 비슷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은 ‘대륙성 기후’ 지역이긴 하지만, 코난 도일이 살고 있던 영국에 비해서는 여름에 극히 더워지는 기후(7~8월에는 섭씨 50도 가까이 기온이 상승)한다는 것을 고려하여 열대 지방이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왓슨의 정체 파악과 더불어, 셜록 홈즈는 왓슨에게 자신의 ‘추리에 대한 지론(탐구자는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방의 모든 특징을 토대로 그의 직업을 알아낼 수 있어야한다)’과 하숙집에 방문한 심부름꾼이 ‘퇴역한 해병대 하사관’임을 맞추게 된 근거에 대해 설명해주며 그의 탐정으로서의 놀라운 천재성을 드러내어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리 근거에 대한 설명 부분은 ‘뛰어난 임상의사’의 모습과도 어느 정도 닮아 있습니다.
진료실을 방문한 환자의 전반적인 상태를 면밀히 관찰하여 그 정보를 진료에 활용하는 것은 많은 의사들이 흔히 쓰는 진료 기술이며, 의사와 같은 셜록의 추리 과정은 코난 도일이 그의 선배 의사인 조셉 벨(Joseph Bell, 1837-1911년)의 진료를 참관하고 영감을 얻어 창조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코난 도일은 <주홍색 연구>를 발표하기 10년 전인 1877년에 조셉 벨의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그의 진료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그 때 ‘피부병에 걸린 남성 환자’를 문진(history taking)하는 장면'이 거의 탐정, 미래에 탄생할 셜록 홈즈와 흡사해 보입니다(각주 4).
벨은 환자와 잠시 대화를 나누고 나서, 그 환자가 제대한지 얼마되지 않은 부사관이며, 하이랜더 연대(스코틀랜드 출신 병사들이 모여 있는 연대), 군생활은 바베이도스(Barbados, 카리브해에 위치한 열대 기후의 섬나라)에서 했음을 맞추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는지 코난 도일이 물어보자(마치 왓슨처럼), 벨은 환자의 신사적이나 딱딱한 행동에서 부사관임을 알 수 있으며, 진료실에 들어와서 모자를 벗지 않는 모습이 군대 생활 습관이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되므로 제대한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권위적인 성격(혹은 독특한 억양)을 보이는 것을 보니 스코틀랜드 출신 같은데,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면 보통 하이랜더 연대에 배속된다는 것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고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환자가 앓고 있는 피부병의 형태가 상피증(elephantiasis)인데, 이 질환은 기생충 감염에 의해 림프관이 막혀서 일어나는 것으로 그 시대에 영국군이 이 기생충에 감염될 만한 곳이 서인도제도 지역(바베이도스가 속한 지역이며, 실제로 바베이도스는 1966년까지 영국령)이므로 바베이도스에 다녀왔다고 추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각주 5).
풍부한 의학적 지식과 뛰어난 관찰력,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하는 추론 능력을 고루 갖춰야 가능한, 벨의 경이로운 진단 과정에 감명을 받은 코난 도일은 이 모습을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인 셜록 홈즈에게 투영하게 됩니다(실제 조셉 벨은 잭 더 리퍼 사건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는 등 여러 범죄 사건 수사에 협조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셜록 홈즈는 누구보다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을 지닌 탐정으로서 모든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전설적인 존재로 태어납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모두 매력적인 작품들이지만, 가장 초기 작품인 <주홍색 연구>는 읽어보면 볼수록 진료 기록지를 읽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의사가 질병의 원인을 알아내고 치료해가는 과정이, 사건 현장을 관찰하고 증거를 수집한 후 범인을 찾아내는 셜록 홈즈의 추리 과정과 닮아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욱 재밌게 읽어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셜록 홈즈가 보여주는, 경험 많은 의사의 진료와도 같은 주홍색 추리의 세계를 경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각주>
1. Conan Doyle, Arthur (Author), Lellenberg, Jon (Editor), Stashower, Daniel (Editor) (2012). Dangerous Work: Diary of an Arctic Adventur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 Owen Dudley Edwards, "Doyle, Sir Arthur Ignatius Conan (1859–1930)",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3. Available at the Edinburgh Research Archive Archived 11 November 2007 at the Wayback Machine.
4. Hume, Robert (4 November 2011). "Fiction imitates real life in a case of true inspiration". Irish Examiner.
5. Memories and Adventures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