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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tros May 20. 2021

멈출 수 없는 춤을 추게 만드는 빨간 구두의 비밀

빨간 구두를 탐내던 소녀는 무도병이었을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은 덴마크의 동화 작가이자 소설가입니다. 1805년에 태어나 1875년에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동화를 남겼습니다. 대표작으로 인어공주, 눈의 여왕, 미운 오리 새끼 등이 있으며, 빨간 구두 역시 그의 작품 중 하나입니다.

빨간 구두는 동화라는 장르의 특성이 무색할 정도로 동심 파괴를 일으키는 내용을 가지고 있죠.


줄거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맨발로 다닐 정도로 가난한 소녀 '카렌'이 구둣방 주인의 호의로 싸구려 빨간 구두를 얻게 되었는데, 결국은 그 빨간 구두의 화려함에 매혹되어 교회에 갈 때도 몰래 신게 되고, 본인이 고아가 된 뒤에 입양해준 할머니를 속이고 계속 빨간 구두를 신으며 일탈하게 됩니다. 

결국 그릇된 욕망에 대한 벌로 빨간 구두를 신은 발이 저절로 춤추게 되고, 그 춤이 멈추지 않아 사형집행인 혹은 나무꾼에게 부탁하여 발목을 잘라내고 나서야 춤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이 동화의 전체적인 줄거리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읽기엔 상당히 잔혹한 내용이며, 어른들 중에서도 발목을 자르는 대목에서는 눈쌀을 찌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리 좋게 해석해보려 해도 동화로서는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이어서 저도 어린 시절 한 번 읽은 후에 거의 찾아보지 않았지만, 의사가 된 후에 다시 읽어보니 조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바로 주인공 카렌이 겪었던 멈추지 않는 춤이 신경과 질환 중 하나인 무도병(舞蹈病, Chorea)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무도병이란 '신체의 한 부분(보통 얼굴, 팔, 다리 등)에서 시작해서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하게, 그리고 종종 지속적으로 다른 부위로 이동하는 반복적이고 짧게 지속되며 불규칙적이고 빠른 비자발적 운동'을 특징으로 하는 증상을 뜻합니다. 

단어에 대한 의학적인 설명는 매우 복잡하지만, 실제 증상을 보면 '춤을 추듯 움직이는 것'과 흡사합니다.

실제 무도병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Chorea'는 '춤'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χορεα (choreia)'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같은 단어에서 파생된 'Choreography'라는 단어는 '안무'를 의미합니다. 

구글에서 'Choreography'를 검색하면 나오는 수많은 안무 이미지들.


이러한 무도병의 원인 중 가장 유명한 질환이 바로 헌팅톤병(Huntington's disease or Huntington's chorea)입니다. 헌팅틴 유전자(Huntingtin gene)의 돌연변이에 의해 발생하는 상염색체 우성 유전 질환으로, 주로 30~40대 성인기에 발병하여 무도증, 걸음걸이 이상, 어눌한 말투, 인지장애, 성격장애 등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헌팅톤병 환자의 뇌 MRI 사진을 살펴보면 전반적인 뇌 위축이 관찰되며,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신경학적 이상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헌팅톤병 환자의 뇌 MRI(좌)와 헌팅틴 유전자 이상(우)

보통 서서히 진행하는 편으로, 발병 후 15~25년 내에 정신과 신체적으로 심한 장애를 겪게 됩니다. 100,000명당 4~10명 정도의 확률로 발병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다른 인종에 비해 백인에서 좀 더 발병률이 높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841년 찰스 오스카 워터스(Charles Oscar Waters)에 의해서 처음 보고되었고, 1872 년에 조지 헌팅톤(George Huntington)에 의해 더욱 상세하게 질병 상태가 상세히 설명 되어, 후에 질환명에 헌팅톤이라는 이름이 붙게 됩니다. 

대략 안데르센이 살고 있던 시기에 처음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질환인 셈이죠.

동화 속 주인공인 카렌이 '소녀'라고 묘사되는 것을 볼 때 헌팅톤병이 잘 발병하는 나이는 아닐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 10대에 발병하는 경우도 있으며, 특히 부모가 헌팅톤병 환자였을 경우 자손이 부모보다 더 빠른 나이에 발병할 수 있습니다.


카렌에게 나타난 무도병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시든햄 무도증(Sydenham's chorea)'을 고려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 질환은 류마티스성 열(Rheumtic fever)을 앓은 어린아이들에게서 발생하는 이상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동화 속 카렌이 어린 소녀이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은 가난한 가정의 아이임을 고려해 본다면, 연쇄상구균(Strepococcus)에 의한 감염 질환이 지나가고 난 후에 시든햄 무도병이 발생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로마 제국 시대의 기독교 순교자인 성 비투스(Saint Vitus)가 무도병의 성인으로 여겨지고(각주 1), 시든햄 무도병(Sydenham's chorea)이 성 비투스의 춤(Saint vitus' dance)라고 불리웠던 것을 보면 무도병의 증상 자체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옛날 사람들이 그 원인을 무엇으로 생각했던 말이죠.

성 비투스(290-303), 로마 제국 시대에 순교한 성인(좌)와 시든햄 무도병 환자의 증상을 묘사한 그림(우). 

안데르센이 무도병이라고 하는 질환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해도, 이러한 이상 운동을 보이는 환자들을 보았거나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으며, 그러한 정보를 통해 자신의 동화 속 주인공인 카렌이 끝없는 춤을 추게 된 이야기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무도병 자체가 여전히 치료가 어려운 질환임을 생각해보면, 자신의 의지로 춤을 멈출 수 없어 발목을 자르는 선택을 해야했던 카렌의 심정이 실제 환자와 보호자들이 겪는 고통과 겹쳐지는 것 같습니다.

현대 의학계는 이러한 무도병의 증상을 조절하기 위한 약제들을 꾸준히 개발 중이며, 언젠가 신경 손상의 진행을 막거나 발병을 예방하는 치료가 나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정보를 하나 더 얘기해보자면, 헌팅턴 무도병의 증상 치료를 위해 처음 개발된 약제인 세나진(Xenazine: 성분명은 tetrabenazine)은 덴마크의 제약회사인 룬드벡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빨간 구두의 나라에서 무도증을 치료하는 약이 개발되었다는 것이 묘한 우연처럼 느껴집니다.



* 각주 

1. 12~13세에 순교했다고 여겨지는 성인으로, 살아있을 때 악마에 사로잡힌(혹은 귀신 들린) 로마 황제의 아들을 치료했다고 합니다. 독일에서는 이 성인을 기리는 축제에서 춤을 추었다고 하며, 이것을 '성 비투스의 춤'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어린 나니에 순교한 성인이며, 이상한 상태(혹시 무도 증상??)의 또 다른 아이를 치료했으며, 축제에서 춤을 춘다는 점 때문에 무도증과 연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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