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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쿠로스 Sep 09. 2024

전자오락이 브랜딩이 되다: HLE의 LCK 우승

전자오락이 브랜딩이 되다: HLE의 LCK 우승


한화생명 이스포츠(HLE)가 어제(`24.9.8) LCK 써머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3년간 상대전적 19연패 중이던 젠지를 꺾고 3% 미만이라던 우승확률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50대 중반의 꼰대 아저씨가 왜 롤게임을 얘기하는지 의아한 분도 계시겠지만 사연이 있다. 나는 2018년 한화생명 이스포츠단을 창단한 초대단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LCK참여 후 6년이 지나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는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금융의 디지털라이제이션과 미래세대인 MZ고객의 확보, 이 두 가지는 이미 포화상태에 접어든 생명보험사에겐 필수적인 숙명이었다. 회사의 브랜드전략을 담당하던 나는 이 두 가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이스포츠단 창단을 추진했고 결과적으로 락스 타이거즈를 인수하여 2018년 LCK 리그에 참여하게 되었다. 2019년까지 3시즌 동안 플레이오프 근처에서 매번 탈락하는 아쉬움을 맛보았고 리빌딩을 목표로 했던 2020 시즌은 최하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LCK의 프랜차이즈화가 결정된 2021 시즌을 앞두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다. 이스포츠를 업으로 하는 대부분의 구단과 달리 기업의 브랜딩을 목적으로 탄생된 팀이다 보니 팀 운영 예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당시는 중국구단들의 공격적인 스카우트로 선수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3년 이상 팀을 운영해본 결과 결국 스포츠는 성적이 가장 중요하고 좋은 성적이야 말로 최고의 브랜딩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위와 같은 논리로 경영진을 설득했고 다행히 경영진에서도 흔쾌히 동의해 주셨다. 그래서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S급 선수들을 스카우트했는데 그들이 바로 초비와 데프트였다. 이 두 명의 활약으로 2021년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롤드컵에 진출했고 8강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난 2021년 단장직을 떠났지만 그 후 HLE는 꾸준히 우수선수를 영입했고 그 결과 2024년 드디어 LCK 써머리그 왕좌에 오르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가 단장을 하며 경험한 또다른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난 단장으로서 팀 연습이나 작전에 관여할 입장이 아니었기에 선수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 방향으로의 지원에 최선을 다했다. 그 중 특히 신경을 쓴 것이 선수들의 체력과 멘탈관리였다. 이스포츠는 대표적인 멘탈 스포츠다. 하지만 선수들의 전성기가 의외로 짧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전성기를 누리고 25세 정도면 노장으로 평가받는다. 만 28세에도 전성기 기량을 자랑하는 페이커 같은 경우는 상당히 예외적인 존재이다. 


난 이스포츠단을 운영하며 이 점이 가장 궁금했다. 20대 중반이면 신체적인 역량이 한 인간의 일생에서 최고점을 찍을 때인데 어떻게 이스포츠 선수들은 그때를 기준으로 하강곡선을 그릴까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은 현상이었다. 대표적인 멘탈 스포츠이기도 하고 아직 20대 초중반의 어린 친구들이 대부분이어서 난 처음엔 선수들 멘탈관리에 많은 신경을 썼다. 코치진 및 스테프들이 선수들과 자주 면담하게 하고 멘탈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등 선수들의 마음관리에 집중했다. 그런데 선수들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이런 프로그램에서의 효용을 말하기보다는 잠을 더 자고 싶다던지 체력운동을 더 하고 싶다던지 하는 반응을 보였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멘탈스포츠로 알고 있는 이스포츠가 의외로 체력적인 보강이 더 필요한 운동이었다. 인간 뇌의 무게는 체중의 2% 밖에 되지 않는데 몸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20%를 쓴다. 그러다 보니 시합에서 보통 2,3 게임을 하게 되면 체력적으로 엄청난 방전이 일어난다. 뇌가 쓰는 에너지의 양이 거의 30%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손가락과 손목을 움직이기에 팔 부위에 대한 맛사지라던지 회복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고 난 후엔 선수들에 대한 지원방향을 전환했다. 특히 새로운 트레이닝센터인 일산 캠프원을 오픈할 때 선수들의 니즈를 충분히 반영한 공간구성을 기획했다. 먼저 이스포츠 업계 최고 수준의 피트니스 룸을 만들었다. 선수들이 틈 날 때 마다 체력보강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전문 트레이너도 제공했다. 다음은 선수들의 휴식공간을 최대한 마련했다. 안마의자, 대형 TV, 소파, 침대 등을 마련하여 선수들이 연습 중 언제든 편히 쉴 수 있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국내 이스포츠 트레이닝센터 중 최고의 식단을 제공했다. 연예기획사 중 YG나 JYP가 구내식당 맛집으로 인기가 있는 것처럼 국내 이스포츠팀 중 가장 맛있는 식사를 선수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선수들의 식사를 담당하시는 이모님이 음식 솜씨는 물론 입담도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캠프원에서 일어나는 먹방 콘텐츠도 만들었다. 지금도 HLE의 유튜브 채널의 ‘힐링식당’은 인기를 끌고 있으며 한화생명 이스포츠단 캠프원은 가장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는 곳으로 관계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88학번들에게 게임은 전자오락이었다. 70년대말 1세대 콘솔게임인 <오트론>으로 테니스, 사격 등을 통해 입문했고 그 이후 오락실에서 <벽돌깨기>, <스페이스 인베이더>와 함께 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슈팅게임의 걸작 <갤러그>가 1982년 중학생시절 등장하며 이 시장을 평정했고 그 와중에 <너구리>, <방구차>, <동킹콩> 같은 귀요미 게임들도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고등학교때부턴 오락실 게임이 좀 시들해지는데 그래도 <버블버블(뽀그뽀글)>은 이 게임음악이 나중에 서태지 표절의혹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90년 이후 가정용 PC 보급이 본격화 되며 <페르시아 왕자>가 또 한 번의 걸작으로 자리매김 했고 90년대말 <스타크래프트>가 실시간 전략게임(RTS)의 새로운 쟝르를 개척하며 X세대에겐 마지막 추억의 게임이 되었다. 롤을 하는 X세대는 거의 없을테니 스타가 결국엔 이 세대의 마지막 게임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80년대의 전자오락은 이제 하나의 산업이 되고 스포츠가 되고 기업의 브랜딩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를 몸소 경험하고 있음에 또 한 번 축복받은 세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화생명 이스포츠단, HLE의 2024년 LCK 우승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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