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구아>를 기억하시는 분이 얼마나 계시려나? 링구어폰 인스티튜트 아메리칸 잉글리시 코스(Linguaphone Institute American English Course)가 풀네임인 <링구아> 영어테이프와 교제를 부모님께서 사 주신 건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이었다. 당시 국민학교 수업시간엔 당연히 영어과목은 없었고 선행학습을 하지도 않는 때였다. 중학교 입학 직전 영어 문법교재가 아닌 <영어회화 테이프>를 사 주신 건 부모님의 선견지명이었다. 지나고 보니 결국 영어는 외국어고 그것을 배우는 이유는 말하고 듣는 것이 외국어 공부의 우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험도 안 보는 영어 듣기나 회화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낀 나는 그 테이프를 거의 듣지 않았다.
게다가 난 그 테이프를 열심히 듣지 않을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국민학교 졸업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부친께서는 그동안 해 묵은 숙제를 하나 하셨다. 그것은 바로 두 아들의 포경수술이었다. 6학년, 5학년인 연년생인 아들 둘의 포경수술은 부친께는 언젠가는 해야 할 골치 아픈 To do List였는데 전격적으로 그 해 겨울 거사를 감행하신 것이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고통에 아프다며 발라당 누워있는 어린 아들에게 부모님은 차마 영어테이프 듣기를 강요하실 수 없었다. 그렇게 100개 가까이 되던 <링구아> 테이프는 집안 어딘가에 방치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88 꿈나무들이 영어 1세대라 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88학번 대입 학력고사에서 <영어 듣기> 과목이 최초로 실시되었다는 것이다. 앞선 글에서 밝힌 것처럼 88 대입 입시제도는 <선지원 후시험>이 실시된 첫 해라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던 해다. 거기에 <영어 듣기>가 추가되고 심지어 <주관식> 마저 전체 점수의 30%나 차지하다 보니 수험생들의 혼란이 매우 컸다. 영어 총 60점 중 1번부터 5번까지가 영어 듣기 문항이었는데 점심시간 다음인 3교시가 영어시험이라 식곤증에 긴장감까지 더해 영어 듣기의 집중력에 많은 애로를 겪었다.
입시제도가 급작스레 바뀐 바람에 영어 듣기에 대한 학교수업은 최소한으로만 이루어졌다. 그 핸디를 감안하여 학력고사 듣기 고사 출제 난이도도 그리 높지 않았다. 6년 전의 <링구아> 테이프 간헐적 선행학습이 플라시보 효과가 되었는지 나도 그리 어렵지 않게 다섯 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입학한 88 꿈나무들은 첫여름방학을 맞아 엄청나게 많아진 자유시간에 살짝 당황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학교 6년 동안은 탐구생활과 일기장이란 언젠가는 할 수밖에 없는 방학숙제가 있었고, 중고등학교 6년 동안은 입시전쟁의 기간이라 어느 정도는 방학 동안 선행학습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게다가 대학생의 방학은 지난 12년간의 초중고 학창 시절의 방학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긴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놀기에는 부모님 눈치도 보였는지라 영리하게도 이들이 택한 방식은 학원등록이었다. 88년도 대학생 신입생에게 인기 있던 학원은 <자동차운전학원>과 <영어학원>이었고 일부 이공대 학생들은 <컴퓨터학원>을 등록하기도 했다. 운전면허는 언젠가는 따야 하지만 1학년 여학생들에겐 우선고려 대상이 아니어서 영어학원 등록이 많았다. 남학생들의 경우 운전면허를 빨리 따서 부모님 차라도 필요시 융통하여 데이트역량을 강화시킬지, 아니면 여학생들이 많은 영어학원에 등록해 직접 <자만추>의 기회를 높일지 선택하는 것이 고민되는 일이기도 했다.
표현상 영어학원이지만 정확히는 <영어 회화학원>이었다. 교포나 원어민이 10명 안팎 규모의 그룹으로 진행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인기 있던 강남의 영어학원은 강남역 사거리에 위치한 <민병철 어학원>, 국기원 가는 길의 <ELS>, 강남구청 부근의 <삼육 SDA>였다. 강북에서는 <파고다 어학원>이 종로의 위치적인 특성과 맞물려 인기를 끌었다. ELS는 유학준비의 목적이 좀 더 강하다 보니 토플과도 연계되고 학원비도 가장 고가였다. 삼육 SDA는 미국 기독교계열의 한 종파에서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되다 보니 원어민이 가장 많았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했다. 하지만 선교가 주 목적인 관계로 종교적인 진입장벽이 있어 선호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민병철어학원과 파고다어학원, 두 토종 영어회화학원이 염불 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았던 1학년들에게 가장 무난 평범한 대안이 되었다. 나는 1학년 여름방학에 민병철어학원 회화과정을 등록했다. 10명 남짓 인원 중 2학년이 두 명 나머지는 다 1학년이었는데 전부 말하기와 듣기 초보였다. 강사는 원어민은 아니고 교포 아줌마였는데 우리와도 친하게 지냈고 특이하게 당일치기로 다 같이 강촌으로 MT 비스무리하게 다녀온 기억까지 있다. 나는 <자만추>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영어로 뭔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뗀 최초의 경험이라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학원비는 여름방학 두 달을 한꺼번에 내는 곳도 있고 한 달씩 나눠내는 곳도 있었는데 공부에 뜻이 없을수록 한 달씩 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여차하면 두 번째 달 학원비를 유흥비로 용도전환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학초기엔 소개팅이 자주 이루어졌는데 혹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만날 경우 부모님께 받은 학원비는 데이트의 구휼자금으로 융통되기에 가장 적합한 비자금이 되기도 했다.
1989년 실시된 <해외여행자율화>는 X세대에게 <최초의 대학생 해외여행>의 경험을 선사했다. 통일의 꽃 임수경이 불법으로 북한을 방북 한 1989년 여름, 대한민국의 대학생들도 합법적으로 비자를 받고 해외여행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는 모두 해외여행이 처음이다 보니 정확히는 <유럽 패키지여행>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배낭여행>이 본격화된 것은 내공이 좀 더 쌓인 몇 년이 지난 후부터였다. 당시 과 선배 한 명이 유럽배낭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 찍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패키지 투어인원이 스무 명 남짓이었는데 이십 대 초중반의 남학생들 중 이 형을 포함해 몇 명이 양복정장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시점으로 보자면 유럽여행에 양복정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땐 그랬다. 해외를 처음 나가는 약소국의 국민으로서 뭔가 깔끔하거나 그들에게 얕잡아 보이기 싫었던 심리 아니었을까? 모르긴 해도 여행사 권고사항 중 하나로 들어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은 군대를 제대하고 떠난 93년 여름의 <미국 어학연수>였다. 현역 군복무 기간이 30개월이었는데 문무대 혜택으로 1.5개월을 단축시켜 나오다 보니 복학까지는 6개월 이상 남은 시점이었다. 당시 매형이 누나와 함께 미국 텍사스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캘리포니아나 뉴욕과 달리 텍사스엔 한국사람이 많이 없어 영어 배우기 좋다는 추천을 받아 텍사스로 결정하게 되었다.
한국사람은 정말 별로 없었지만 일본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다 보니 텍사스에서의 한 학기 동안 내 친구는 대부분 일본친구들이었다. 서로 못하는 주제에 영어공부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겠냐만 적어도 내겐 <외국인들과 영어로 말하기>를 계속 연습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학기를 마치고 일본인 친구 4명과 한국인인 나 혼자, 20대 초반의 아시아 남자애들 다섯 명이 포드 토러스 한 대를 렌트해 한 달간 미국 로드트립도 다녀왔다. 회사원이었으면 꿈도 못 꿨을 한 달간의 로드트립을 가장 젊고 건강했던 시절에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인생의 큰 행운이었다.
어학연수를 다녀와 복학한 1994년은 김일성이 죽은 해 이자 올해(2024년) 만큼 무더웠던 때로 기억되는 해다. 만 3년이 지나 복학한 캠퍼스에서 가장 눈에 띈 변화는 학생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캠퍼스를 걸어 다니는 것이었다. 물론 역사에 남을 무척 무더운 여름이긴 했으나 1990년도 까지는 해변이나 여행지가 아니라 학교 안에서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생수통을 들고 걸어 다니며 마시는 광경도 과거엔 볼 수 없는 낯 선 모습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미국이나 유럽을 다녀온 친구들이 평상시에도 선글라스를 끼거나 생수통을 들고 다니는 외국인들의 모습에 익숙해졌기에 한국에서도 과감히 시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88 꿈나무들이 영어 1세대라 할 수 있는 결정적 이유는 이들이 졸업 후 취업하는 시기에 대한민국 대기업들이 처음으로 <토익점수>를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도 1994년 한 해 동안 원하는 점수를 얻기 위해 토익을 몇 번 보았고 운 좋게 그 해 말 입사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 당연히 여겨지는 토익을 처음 준비하고 입사한 세대이다 보니 한 두 해 앞 선배들에 비해 영어능력은 최소한 두드러지게 좋았다. 720점 이상이 2등급이고 860점 이상이 1등급인데 당시 신입사원 상당수가 2~3등급 이상이어서 선배사원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줬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1995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1995년을 세계화의 원년>으로 삼자며 <세계화>의 본격 기치를 내걸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1995년에 WTO에 가입했다. 정부의 세계화 정책에 기업도 호응하여 해외 사업을 본격 강화하기 시작했다. 운 좋게도 영어로 무장된 이런 신입사원들은 입사초기부터 해외 관련 부서에 전진 배치되어 해외 비즈니스의 커리어를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기도 했다.
요즘 대학생들과 신입사원들은 영어점수는 기본이고 해외여행 시 간단한 영어회화 정도는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된 거 같다. 어쩌면 지금과 같이 '일'과 '생활'에서 <영어에 대한 장벽>을 극복하기 시작한 최초의 세대가 X세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