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정확히 30년 전인 1994년 추석, 나는 태어나서 처음 인터넷에 접속했다. 추석 연휴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하이텔에 접속했는데 ‘인터넷 접속’이라는 메뉴를 보게 되었다. 당시는 인터넷이란 개념도 낯설었고 Netscape 프로그램도 한국에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이텔의 여러 메뉴를 돌아다니던 중 인터넷을 통하면 전 세계 도서관에 접속하여 정보를 받아 볼 수 있다는 글을 봤다. ‘아니 한국 내 방에 앉아 미국 도서관에 접속할 수 있다고?’ 군대 제대 후 복학한 4학년 마지막 학기여서 정신을 차렸던 걸까, 말초적인 콘텐츠에 더 관심이 가던 평소와 달리 미국도서관에 접속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매혹시켰다.
1994년이면 지난해 미국 어학연수 중 만난 일본친구들과 손으로 쓴 편지를 국제우편으로 주고받을 때였고 무료 국제통화가 가능하다는 사업모델로 세기말 코스닥열풍의 황태자로 새롬기술이 등극하기 5년 전의 일이다. 수십 번의 시행착오는 물론 전화기 모뎀의 느린 속도와도 사투 끝에 결국 새벽 즈음 인생최초로 인터넷에 연결될 수 있었다. 그때 처음 접속한 곳이 <Pennsylvania University Library>였다. 파란색 화면에 하얀색 영어 텍스트가 전부였지만 내가 미국대학 도서관에 들어와 있다는 가상체험을 하며 이 메뉴 저 메뉴 돌아다녔던 순간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미국 도서관 여행이 지루해져서 다른 메뉴들을 찾다가 <Movie> 메뉴로 들어갔다. Movie 카테고리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영화포스터나 배우의 사진 등을 집에서 출력할 수 있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당시는 <다운로드>라는 개념도 명확하지 않은 때라 그저 한국의 내 방에서 미국 정보에 접속해 그 사진을 출력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텍스트 기반이기에 제목만 알 수 있는 내려받을 사진들 중 고심 끝에 난 <드류 베리모어>의 사진을 골랐다. 딱히 그녀의 팬도 아니었는데 내가 왜 드류 베리모어를 선택했는지는 지금도 의아한 일이다. 아마 E.T의 예쁜 꼬마에서 10대 시절 마약, 자살시도 등 시련기를 거쳐 1994년 당시 다시 재기하시 작했다는 기사를 본 기억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도트프린터의 치직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 한 줄 인쇄되기 시작한 <드류 베리모어>의 얼굴사진을 보는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전화기 모뎀의 느린 속도 덕분에 출력이 끝난 것은 추석연휴의 새벽 아침이었지만 그 생경한 경험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이상아>, <김혜수>의 사진을 100원 주고 가게에서 샀던 때가 7,8년 전인데 집에서 해외 여배우 사진을 출력할 수 있다는 것은 인터넷의 파괴력을 각인시키기에 최고의 경험이었다.
군대와 어학연수를 마치고 4학년으로 복학 한 1994년 초, 난 인생 최초의 컴퓨터를 구입했다. 군대 가기 전인 1990년까지 리포트를 워드프로그램으로 타이핑하여 출력한 적이 없었다. 모두 리포트용지에 펜으로 써서 제출하였다. 국민학교 1학년때부터 악필로 유명했던 나는 어머니께 엄청 혼이 나기도 했지만 악필은 성인이 되어서도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학부시절 내내 저조한 학점은 리포트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악필도 한몫했으리란 핑곗거리 겸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런데 3년 사이에 대세는 전부 컴퓨터로 타이핑하여 출력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군대 가기 전 3학년 6학기 동안의 처참한 학점을 기억하기에 4학년으로 복학하자마자 컴퓨터를 샀다. 삼성전자, 금성사 등 대기업 브랜드도 있었지만 컴퓨터를 잘 아는 과 친구의 도움을 받아 용산전자상가의 조립식 PC가 나의 첫 PC가 되었다. 브랜드는 없는 대신 고사양으로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 친구의 조언이었는데 그런 조립 PC가 200만 원 정도였다. 200만 원은 너무 비싸다고 학생인 점을 어필하며 흥정하여 최종적으로 195만 원 정도에 샀던 것 같다.
사양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윈도 3.1 버전에 CPU 사양이 386이었다. 주목적이 리포트를 쓰는 것이었고 <하이텔>에 접속하거나 <페르시안 왕자> 같은 게임정도만 하면 되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한 사양이었을 것이다. 1963년, 1964년생이 막 30대에 접어든 시점이니 만큼 그 유명한 대한민국 386세대의 탄생과 90년대 중반의 386 CPU 역사는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윈도(창) 같았던 격자 창의 윈도 3.1은 매킨토시 GUI를 따라 한 윈도 95가 1995년 탄생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학 시절 전공기초 한 과목과 교양선택 한 과목을 컴퓨터 과목으로 수강했다. <포트란>과 <파스칼>이었던 것 같은데 전공기초야 필수니 그렇다고 해도 교양선택을 왜 또 선택해서 D학점으로 깔았는지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컴퓨터 관련 산업이 미래에 유망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기에 방학기간 중 강남역 <중앙전산학원>을 등록해 놀지만은 않고 뭔가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마음의 평온함은 얻었던 것 같다.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사이 컴퓨터공학과나 전산학과를 다닌 사람 중 사업적 선견지명이 있었던 사람들은 90년대 중 후반 벤처창업을 통해 1세대 유니콘에 등극하기도 한다. 이해진, 이재웅, 김범수, 김택진, 김정주 등이 그들인데 1966년에서 1968년생들이다. 그들은 X세대보다는 조금 앞선 세대며 운동권 386세대들과는 같은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로서 대한민국의 산업화에 <이병철>, <정주영>과는 또 다른 형태의 창업자로서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삼성그룹의 경우 1인 1PC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은 1996년 즈음이었다. 그전까지 한 팀에 여직원 책상과 팀장 책상, 그리고 팀 인원수에 따른 공용 PC가 있었다. 1996년 <유니텔>이 삼성그룹 내 베타 테스트가 시작되며 개인 PC 지급이 본격화되었으며, 사무실에서 자신의 PC를 통하여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X 세대는 기업체 입사와 동시에 거의 전부서에서 전산담당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기존의 간부 사원들은 윈도나 워드프로세서의 이용은 차치하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구별조차 개념이 모호할 정도로 컴퓨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X세대는 컴퓨터를 제대로 다루 기 시작한 최초의 비 컴맹세대며 인터넷이 실생활과 점점 밀접 해 지면서 e-business니 벤처니 하는 열풍 속으로 달려들어간 최초의 세대기도 하다.